이기는 페미니스트 “양파”, 여성 개발자 세미나 현장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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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0일, 서울 중학동 <한국 마이크로소프트> 강당에서 페미니스트 ‘양파’와 함께 한 ‘여성 개발자로 살아남기’라는 세미나가 열렸다. 양파는 페이스북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페페미계의 대모’로, 영국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하는 현직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다.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 일곱번째 에피소드를 통해 소개한 바 있다. 걸스로봇과 페미회로가 공동주최한 이 자리에는, ‘테크페미’로 현직에서 활동 중인 여성 개발자 150여 명이 모였다. 양파 특유의 빠르고 유쾌한 말솜씨와 열기로 가득했던 세미나 현장을 지면으로 소개한다. 현장 스케치는 <페미회로> 곽희나, 이유진이 작성했고, 강미량이 교정을 맡았다. 최종편집은 <걸스로봇>에서 진행했다.
(참석자들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신분이 덜 드러나는 사진을 우선적으로 선별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 부탁드립니다.)

‘양파’님의 인터뷰 보기

 

개미굴에 쏟아지는 뜨거운 물을 피하는 법

“일요일 낮인데, 사람들이 많이 올까?” “행사를 치르다보면 ‘노쇼(no show)’가 반일 때도 있다는데 어떡하지?” 걱정과는 달리, 150여 명의 참가자들이 가득 메운 모습을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렇게 많은 여성 개발자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게 놀랍기도 했고, 뿌듯하기도 했다. 과학기술계에 발 담그고 있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직업적인 관심사나 기술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는 대부분 남성들로 가득차 있었다. IT 업계에서 이런 ‘여초’ 행사가 열린다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개미굴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살기 위해 많은 개미들이 뜨거운 물을 피해 도망치겠지요. 열심히 달린다고 해도 안전하게 살아남는 개미는 얼마 되지 않을거에요. 그렇지만 뜨거운 물을 피하지 못한 개미라고 해서 살아남은 개미보다 덜 열심히 달린건 절대 아니지요. 그저 달리고 있는 방향의 운이 얼마나 좋았는지, 여건이 되었는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일거에요. 개미들과 마찬가지로 테크 업계에 종사하는 여성들도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성별의 불리함을 느끼지 못하고 성장하다가, 취업을 하고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이 ‘뜨거운 물’을 겪고 말아요. 제게는 여기 모인 백오십여 명의 현직 개발자들, 개발자로의 이직을 꿈꾸는 직장인이나 진로를 가늠중인 학생들의 이 열정이 ‘뜨거운 물’을 피해 이전보다 더 나아지고 달라진 삶을 살기 위한 달리기의 현장으로 보였어요.”

서두부터 뜨거웠다. 안 그래도 우리 스태프들은 스스로를 일개미에 비유하고 있었다. 개미굴에서 뜨거운 물을 피하기 위해 ‘뚠뚠’ 일하는 페미개미들이라니.

세미나는 남성이 다수인 직업에 대해 생기는 선입견이나 통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올 초 화제가 됐던 영화 <히든 피겨스>처럼, 한때 전산학 분야의 직업은 완력을 쓰거나 위험한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여성이(계산하는 사람, 즉 ‘computer’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당 분야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점차 주류로 올라오면서, 성비가 뒤집어져 50여 년이 흐른 지금은 컴퓨터란 마치 남성의 일처럼 여겨지고 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돌봄은 여성의 일이다’는 관념이 작용한 결과 의사 직군의 여성 비율이 높아지며 월급 수준은 낮아진 일도 있었다. 양파는 이처럼 사회-문화적인 통념이 여성들의 직업 선택의 폭을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지며, ‘여성은 개발자라는 직군을 택하지 않는다’, 더 넓게는 ‘여성은 이공계에 오지 않는다’는 현상과 그를 둘러싼 사회 통념은, 오히려 그 원인이 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역으로 반영하며 이공계와 개발자 여성에 대한 편견들을 더 부채질하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여성이 개발업계에서 겪는 차별적인 문화 경험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양파는 사회적인 편견에 더해, 남중, 남고, (여성의 비율이 적은) 공대, 군대 등으로 이어지는 생애 경험을 통해 남성들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풀이했다. 남성만으로 이뤄진 작은 사회 안에서 ‘그들만이 향유하는 문화적 차이’가 공고해지면서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개발자의 해외 취업과 이직에 관한 주제도 뜨거웠다. 개발자는 기술이 있기 때문에, 근무 환경이나 나라를 바꾸기 상대적으로 쉽다. 그 안에서도 특정 회사에 필요한 사람보다는 범용적인 사람이 이직에 유리하다. 또 좋은 학벌보다는 좋은 회사를 다닌 경력과 인맥이 세계 시장에서는 더 효과적인 스펙이란다. 해외 취업의 경우 대부분 1) 이력서 통과, 2) 전화 인터뷰, 3) 현장 인터뷰로 진행되는데, 같이 일했던 동료가 추천한 경우 첫 번째 과정을 뛰어넘고 바로 전화인터뷰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꿀팁’으로는, 어떤 나라를, 어떤 이유에서 추천하는지도 들을 수 있었다.

양파는 개발자라는 직군이 여성들에게 권할만한 직업이라고 추천했다. 재택근무를 할 수 있고, 근무시간 조절이 가능하여, 가정과 병행할 수 있기 때문.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성만이 이런 것을 고려해야 하는 현실에 화가 난다고도 토로하기도 했다. 한 참석자가 직장에서 페미니스트임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을 때, 짐작과는 달리 “직장에서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알리지 말고, 또 알릴 필요도 없다”고 조언해 놀라움을 샀다. 회사에 출산휴가, 육아휴직이 없다면, 그것들을 하나씩 요구하면서 조금씩 바꿔나가라는 것.

 

페미 개발자로 살아남기

Q&A 세션 역시, 예상시간을 훌쩍 넘기며 진행됐다. 질문이 넘쳐 네트워킹을 위해 끊어야 했을 정도였다. 해외 취업이나 개발 관련, 페미니즘에 관해서까지 참석자들의 관심은 다양하고 폭넓었다. 해외 이직을 준비하는 현직 개발자, 구직자로부터 개발자 전문 헤드헌터, 스타트업 대표, 국내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는 개발자까지 참석자들의 신분도 다양했다. IT 업계 안에서도 데이터 사이언스는 물론, 금융계 통계 업무, UX 디자인, 웹 퍼블리셔, 개발 및 보안분야 등 세분화된 질문을 들으며, 질문에서 배울 수 있었다. 개발자의 테크트리나 성장 방향에 대한 다양하고 진지한 고민들과 각 분야의 고충을 나누는 동안, 저절로 공감대도 마련됐다.

한 참석자는 여자가 너무 없는 비 IT 직종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저평가받다가 결국 IT분야로의 이직을 마음먹고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이전 직장에서 수년간 차별적인 발언이나 성희롱과 싸우다가 결국 이걸 피해 다른 분야로 이직했는데, 여전히 유리천장을 부술 길은 요원해 보인다는 거였다. 끝까지 부딪히며 부숴야 할지, 부수지 못하면 피해야 할지, 당장의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이 할 법한 고민이었다. 양파는 한국 사회 내에서도 차별에 대한 사회적인 감수성, 성희롱에 대한 민감도가 점진적으로 천천히 올라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노력들이 헛되지 않을 거란 답변을 들려줬다.

남학생 위주 진로 교육이 이뤄지는 IT 계열 고등학교에서 남들보다 한발 먼저 개발자의 꿈을 꾸는 여자 고등학생, 코딩 교육을 받으며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의 경험을 쌓아가는 분, 양파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읽으며 산후우울증을 해결했다는 개발자, 그리고 남중-남고-공대를 거쳐오며 페미니즘을 어떻게 공부해야할지 배우고 싶다는 남페미 등 인상적인 질문자들에게는 양파가 직접 사인한 책을 선물했다. 현장에서 배포된 다섯 권은 출판사에서 제공했고, 사후 해시태그 리뷰 이벤트 등을 통해 선정한 다섯 사람에게는 걸스로봇에서 구매한 책을 보내드리기로 했다.

 

네트워킹

해외 IT 취업, 여성 개발자, 데이터 사이언스, 페미니즘으로 그룹을 나누어 모여앉은 이들을 중심으로 네트워크의 시간을 가졌다.

컴퓨터공학 전공을 살려 개발자로 해외에 재취업하기 위해 준비하는 현직 교사, 석사 유학 후 취업을 준비 중인 학생, 이미 퇴직을 하고 준비에 나선 이 등 해외 취업에 적극적인 이들이 모여, 자신의 노하우를 공유하고 정보를 나눴다.

현직 개발자들은 한국 회사 특유의 분위기가 갑갑해서 해외 진출을 꿈꾸는 케이스가 많았다. 삶의 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워라밸(Work-Life Balance)’ 측면에서 해외 근무가 월등히 양호할 것이라 기대하면서도, 사람마다 기대수준이 달라 실망하거나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오게 될 걱정이 제일 컸다.

한국의 기업문화도 많이 좋아지고 있는 추세지만, 아주 소수의 기업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부족한 게 사실이다. 전반적으로는 기술 부채나 리팩토링(*refactoring – 코드를 재조정하여 가독성을 향상시키는 등 전체 디자인을 개선하는 방법)의 부재, 레거시코드(*legacy code – 이전에 작성된 코드 중 테스트가 불가능한 코드)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개발자가 쉬 마모된다. 또한 멤버 변동이 심한 탓에 서비스 오픈 날짜에 쫓기거나, 심한 사내정치, 성희롱 등에 시달리곤 했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페미니즘 주제에는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참석자들까지 합류해 점점 큰 판으로 확장됐다. 여성 개발자의 옷차림을 제한하는 회사 분위기로부터 육아와 경력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어려움, 여성에게 아름답다는 찬사 또는 평가는 과연 온당한지에 관한 문제제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나의 불편함이 나에게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불편함을 나누고 개선책을 찾아보는 데까지 진전되는 것을 보니 큰 위안이 됐다.

 

중국 출장 길에 잠시 짬을 내 한국에 들러 귀한 말씀 나눠주신 페페미 대모 양파와 열정적으로 세미나에 참여해준 모든 참가자들에게 감사하다. 여성 개발자들이 모일 수 있는 자리가 더 자주 생겨나, 더 많은 이들이 위안과 격려를 나누고 정보를 공유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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