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tists∩Feminists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 XIX: 조금 더 나은 실패를 위하여, 페미회로 PM과의 만남

0

지난 3월 12일 대전에서, 국내 5개 지역거점 과학기술중심대학(DGIST, GIST, KAIST, POSTECH, UNIST)의 페미니스트 연합모임 <페미회로(영문명 FemiCircuit)>가 공식 출범했다. 페미회로는 이공계 내 젠더 불평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지속 가능한 페미니즘을 실천하려는 모임이다.
(페미회로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femicircuit)

페미회로에서는 2017년 연중 프로젝트로 이공계 내 여성 과학자, 연구원들과 우리 주변의 페미니스트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이름을 얻었거나 얻지 않았거나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연구하고 고민하며 실천하는 이공계 여성 연구자들을 통해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보다 조금 뒤의 미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페미회로>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지 어느덧 1주년을 앞두고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페미회로>의 창립 멤버로서 1년간 활동해 온 PM(Project Manager)을 만났다. 그는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학내 페미니즘 이슈를 공론화한 뒤, 학내 페미니즘 동아리와 <페미회로> 연합체를 거치며 활발한 페미니즘 운동을 이어왔다. 그와 함께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이공계 특성화 대학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그 속에서 어떤 고민과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지 들어봤다.

<페미회로> 인터뷰어는 신연주, 조희수로, 회로라고 표기했고 인터뷰이는 익명 요청에 따라 PM으로 표기했다. 검수는 김한솔, 지은경 (이상 가나다순)의 검수팀이 맡았다. 최종편집과 발행은 <걸스로봇>이 담당했다.

회로: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기소개 먼저 부탁드려요.

PM: 안녕하세요, <페미회로> PM(Project Manager)입니다. 초대 PM직을 맡아 활동했어요. 곧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 입학합니다.

회로: 인터뷰에 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PM: 이 인터뷰를 진행하는 부PM님에게 저 역시 인터뷰를 부탁드렸기 때문에 양심상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웃음)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너무 바쁠 때라 별 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는데,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회로: 페미회로로서도 의미 있는 회고의 자리가 될 것이라 여겨 요청했어요. PM님에게도 즐거운 경험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여고에서 과학중점대학에 진학한 경우라 초반에는 적응하기 어려웠어요. PM님도 여고를 나오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대학에 진학하면서 전과 다른 점들을 많이 느꼈나요?

PM: 그렇죠. 같은 반 여학생들과 외모 비교도 많이 당했고요. 당시에는 기분이 나빴다기보다는 묘하고 이상했어요. “너 못생겼어!”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도 아니니 화를 내기도 이상했고요.

회로: 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그런 부분이 더욱 스트레스였겠네요.

PM: 1학년 때는 다른 일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를 스스로 많이 고립시켰던 것 같아요. 공부를 열심히 하는 대신 친구들과 덜 만났죠. 2학년이 되어서야 학교에 적응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선후배들과 친해졌어요.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과 수석도 한 적 있고요. 그런데 가끔 그걸 제 능력으로 봐주지 않고 “누가 도와줬겠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여학생은 학점만 잘 받고 연구는 못한다”라는 말도 들었고요.

사실 저는 전공 공부를 정말 좋아했어요. 새로운 걸 알게 되었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 좋았거든요. 아마 제가 버틸 의지가 있었다면 그냥 전공 대학원에 진학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런 말들이 쌓이니까, ‘여기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물론 전공을 바꾼 이유가 이것만은 아니에요. 새로운 분야의 내용들이 더 재미있던 이유가 컸어요.

회로: 저도 여고에선 그냥 반장이었는데, 대학에 오고 나니 ‘여자 회장’ ‘여학생’으로 불린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PM: 그렇죠.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여자친구, 어느 과 여학생 등의 다른 무엇인가로 자꾸 불리게 되면, 자신의 자리를 의심하게 돼요. “남자친구가 공부 도와줬겠지”, “쟤는 여학생이라서 ~할 거야.”라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다 보니, ‘여기가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회로: 학과 학생회장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PM: 네, 그런데 ‘여자 학생회장’이라는 자리가 주목을 많이 받아서, 긴장을 많이 했어요. 웃기지만 ‘여자 학생회장은 술 뺀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술을 무리해서 마시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남자친구 허락받았냐”는 말도 들었어요. 걱정하는 의미에서 하는 말인 것 같긴 했지만, 기분은 역시 이상했죠.

회로: 저라면 기분이 나빴을 것 같아요.

PM: 해서는 안 될 말이었죠. 그래도 당시의 그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우리는 함께 변하고 성장해가는 중이잖아요. 어느 곳이나 다 그렇겠지만 특히 학교는 교육 공동체이니까 서로에게 기회를 많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를 강하게 비난만 한다면 아무도 기회를 못 얻으니까요. 지금 이렇게 인터뷰를 하고 페미니즘 이슈에 대하여 논의하는 우리들도, 2, 3년 전만 해도 페미니즘에 관해 거의 몰랐잖아요. 우리도 똑같은 잘못을 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쉽게 비난할 수가 없더라고요.

비판할 점, 고쳐야 할 점을 눈감고 넘어가자는 의미는 아니에요. 문제 제기는 분명 필요해요. 다만 가능성을 조금 더 믿고 싶은 거고, 문제를 지적하더라도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면 좋겠어요.

회로: 그렇군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PM님이 페미니즘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가 점점 궁금해지는데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아무래도 이공계 특성화 대학에서 페미니즘을 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요.

PM: 과학기술학 수업을 계기로 알게 되었어요. 여러 일을 겪다 보니 문제의식은 있었지만, 그걸 페미니즘이라고 이름 붙이지는 않았어요. 공대에서 개인이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기는 쉽지는 않으니까요. 제가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을 때는 페미니즘이 지금처럼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더욱 어려웠어요. 무섭다고 생각한 시절이었으니까요. 주위에 남자인 친구들이 되게 많은데, 페미니즘과 관련된 얘기가 나오면 친구들이 반감을 표시하기도 했어요. 사실 여자인 친구들 사이에서도 당시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그리 높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친구들끼리 무엇이 문제라고 얘기는 하지만, 그게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논의되지는 않았던 거죠.

회로: 수업에서 배운 지식을 운동으로 이어 나가겠다고 결심하기까지 또 다른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PM: 우리가 흔히 페미니즘을 접하는 것을 ‘빨간 약을 먹는다[1]’고 표현하잖아요. 배운 후에는 본 것, 겪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에 부채의식이 생기더라고요. 당시에 제가 고학년인 데다가 학과에서 대표직을 한 적이 있어서 학교에서 발언권이 꽤 있는 상태였어요. 또 졸업을 앞둔 상황에서, 학교 다니면서 겪었던 안 좋은 일들을 누군가가 다시 겪게 하고 싶지 않았고요. 솔직히 말하면 어쩌다가 그냥 하게 된 것이에요. 그때만 해도 해시태그 운동이 제 인생을 이렇게 바꿔 놓을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졸업 후에 그냥 전공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했거든요. 지금은 제 인생이 너무나 많이 바뀌었네요. (웃음)

회로: 그렇군요. 지금 PM님이 있는 이공계 특성화 대학이라는 환경의 특징들이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이공계를 흔히 ‘남초’ 환경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하잖아요.

PM: 이공계 특성화 대학은 전체 학생 수가 많지 않고, 여학생들의 비율이 낮은 편이죠. 처음에 입학하면 적응을 해야 하는데, 이때 여학생들이 절대적인 수가 너무 적다 보니 적응하기 힘들어하기도 해요. 수가 적어서 마음 맞는 친구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자라고 주목을 많이 받거든요. 일례로 남학생들에 대한 소문은 잘 돌지 않지만 입학할 때부터 이번에는 어떤 여학생이 예쁘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곤 하죠. 술자리에 여학생을 부른다거나 하는 일들도 있고요. 여학생은 이렇더라, 하는 말을 듣기도 쉽죠.

아까 말씀드린 해시태그 운동을 할 때 이 문제에 관해 논란이 많았어요. ‘그냥 여학생들이 수적 소수자라 그런 거 아니냐’, ‘수적으로 적으니까 여학생들이 눈에 띄어서 그렇다.’는 식으로요. 그런데 이건 단순히 여학생들이 소수여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에요. 모든 수적 소수자의 특징들이 두드러져 보이거나, 혹은 어떤 특징이 개별자가 아니라 집단 그 자체의 특성으로 치환되지는 않거든요. 우리 사회에 ‘수만 적은’ 집단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건 여학생이 공대에서 수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수자라는 것이 교차되어 생기는 문제죠.

회로: 그러게요, 단순히 수가 적어서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니까 대학에서 여학생들을 고립시키는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환경들을 섬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네요. 또 다른 특징들이 있을까요?

PM: 각 대학이 지역에 있다는 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지역에는 수도권보다 학교가 띄엄띄엄 있잖아요. 학교가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보니 다른 학교 학생들을 만날 수 없는 환경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어쨌든 나는 이 학교 안에서 적응을 해야 해!’라고 생각하게 되죠.

학내 수업들이 이공계열 전공 위주로 구성되다 보니, 인문사회학부 과목들이 부차적인 과목 정도로 여겨지는 경향도 있는 듯해요. 실제로 과목이 많이 개설되지 않기도 하고요. 저는 교양 과목에서 삶에 놓인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조정할 수 있는지,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지를 배운다고 생각해요. 이공계 전공 지식과는 분명 다르지만, 인문학 또한 저희가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필요한 기본적인 감수성과 지식을 다루죠.

그런데 교양 수업이 많지 않다 보니 페미니즘을 접할 기회가 부족한 듯해요. 단적으로 각 학교에 여성학 수업이 거의 없어요. 내년에 포스텍에 한 과목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다른 학교에는 정식으로 개설된 여성학 수업은 없다고 알고 있어요. 저도 수업을 통해서 페미니즘을 접했잖아요. 반대로 말하면 그 수업이 아니었으면 접하지 못했겠죠. 종합해보면, 이공계 대학은 담론이 생기기 힘든 환경이고, 생기더라도 퍼지기 힘든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회로: 이공계 대학 환경에서 운동을 시작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PM: 학교를 다니면서 수많은 사건을 보고 듣고 겪었어요.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일들은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했고, 설령 수면 위로 올라온다 하더라도 보통 피해자가 상처를 받고 끝나더라고요. 사실 말하기 시작한 건 제가 처음은 아니에요. 그 즈음부터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거든요. 저는 그 흐름에 용기를 얻어서 더 크게 말하고 싶었던 거죠. 일을 저질러 놓고 후에 걱정하는 편이라, 일단 저지르고 봤던 것 같아요.

먼저 글을 쓰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봤어요. 그런데 학교 내에 진짜 차별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여학생과 남학생들의 인식 차이가 너무나 큰 거예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페이스북에, 우리 학교 여학생들만 들어올 수 있는 그룹이 있어요. 거기에 사례 제보를 부탁한다는 글을 올리니까, 하루 만에 50여 개의 사례가 모였어요. 한 학년 여학생 수가 60명에서 70명 정도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엄청난 수의 실명 제보가 올라온 거죠. 그렇게 모은 제보들과 이전 총학생회에서 나왔던 자료들을 모아서 사례를 분류하여 글을 썼고, 그 글의 말미에 해시태그 운동을 제안했어요. 해시태그 운동이 끝나갈 즈음 <페미회로> 회원이기도 한 지은경님께서 스터디 그룹을 열겠다는 글을 올리셔서 스터디 그룹이 생겼고요.

회로: 당시 기분이 어땠나요?

PM: 정말 힘들었어요. 자고 일어나면 글이 여기저기로 공유되어 있고, 댓글이 80개씩 달렸거든요. 저는 그 정도의 스트레스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제가 과도한 주목을 받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이것을 유행으로 치부한다는 것이 큰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사실 유행이라도 괜찮은 것 같아요. 그 전에는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죠.

그 이후에 인간관계가 많이 변했어요. 원래 알던 사람들과 관계가 끊기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면서요. 가장 큰 변화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많이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페미니스트지만, 모든 관계에서 그 정체성으로’만’ 인식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다들 제가 페미니스트인 걸 아니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이후 조금 내향적으로 바뀌었어요. 전에는 이런 일을 겪으면 제가 좀 더 단단해 질 줄 알았는데, 막상 일을 겪고 보니 ‘단단해진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그러나 그간 제 주변 사람들도 많이 변했고, 저도 많이 성장했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아요. 이제는 제가 응당 받아야 할 존중과 배려를 포기하지 않게 됐어요. 친구들이 저와 의견이 다를 수 있어요. 어떤 이슈에 대해 생각이 다르거나 받아들이는 속도가 다를 수는 있거든요. 그런데 무조건 제가 틀렸다는 가정을 하고 원색적인 비난을 하거나 뒤에서 욕을 했을 때 가만히 있지 않게 됐지요.

회로: 당시에 어떤 논의를 나눴나요?

PM: 우리가 과학을 전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과학계 또는 과학 지식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고요. 왜 이곳에서 젠더를 논의해야 하는가가 주된 주제 중 하나였어요. 예를 들자면, ‘과학지식’의 입장에서 왜 젠더를 고려해야 하냐는 거예요. 사회과학은 이해가 되는데, 과학은 흔히 ‘가치 중립적’이라고 생각되니까요. 이 부분에서는 예전에 들었던 과학기술학 수업이 도움이 됐어요.

또 ‘과학을 수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왜 젠더를 고려해야 하는지도 많이 이야기했어요. 여자라도 능력이 있고 연구를 잘한다면 똑같이 성공할 수 있는 거 아니냐, 성별은 과학자로서의 성공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거예요. 즉 과학계는 능력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젠더 감수성이 크게 필요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하여 제가 느꼈던 것은, 왜 항상 질문이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냐는 거예요. 소수자라는 위치는 늘 질문을 받는 입장이에요. ‘왜 너희를 지원해줘야 하지? 왜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하지? 그 이유를 설명해봐.’라는 질문은 늘 소수자를 향하잖아요. 이때부터 질문 자체를 고민 해보게 된 것 같아요. 어떤 질문이 있으면 답을 고민하기 전에 ‘왜 그런 질문이 나왔지?’라고 새로 질문을 던지게 된 거죠.

회로: 이 질문을 꼭 한번 해보고 싶어요. 다시 돌아간다면 해시태그 운동을 또 할 것 같나요?

PM: 네. 실제로 다시 돌아갈 일은 없으니까요. 장난이고, 할 것 같아요. (웃음)

회로: 이제까지 여러 활동을 하면서 느낀 개인적인 소감을 말해줄 수 있나요?

PM: 해시태그 운동을 하면서 좋았던 건, 제가 속한 공동체가 실제로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에요. 이 기억은 앞으로도 제 인생에 큰 힘이 될 거에요. 또 어떤 변화를 대할 때, 그것을 이뤄낸 사람들을 생각하고 존중하게 되었어요. 가끔 “어차피 세상은 진보하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 무리할 필요가 있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진보가 자연스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현재는 그 과정을 성찰하기에는 특권적인 입장 아닐까요? 이미 진보의 혜택을 누리고 있잖아요. 여기저기로 부딪치다 보니 어렴풋이 이런 것들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세상이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다치고, 말하고, 운동하고, 상처받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배운 거죠.

회로: 지금까지 이공계 특성화 대학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PM님이 개인적으로 이공계 특성화 대학에 바라는 점이 있나요?

PM: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저는 학교가 싫지는 않아요. 오히려 학교를 사랑하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학교라는 공동체는 늘 무언가를 배우는 곳 같아요. 제가 이곳에 바라는 것은, 나중에 우리가 어딘가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서로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러려면 이 공간에서 사람들이 겪었던 아주 사소한 경험들, 아주 사소한 관계들이 긍정적이어야 하겠죠. 사소한 게 제일 오래 가는 법이니까요. 저는 우리가 했던 토론과 활동들이 이 관계를 좀 더 긍정적이고 존중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렇게만 말하고 끝내면 안 되겠죠? (웃음) 제가 가까운 미래에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는 건 학교 간 연대에요. 지금까지는 회로 자체의 안전도 보장되지 않아 연대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조심스러웠어요. 앞으로 어떻게 서로를 도울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있어요. 그게 안 되면 각 대학들이 고립되어서 서로의 문제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더 악화될 수 있거든요. 학교의 고립을 깨는 건 결국 당사자들이어야 해요. 학교 차원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학생들이, 또는 학생 단체가 하면 좋은 것이 있어요. 각 이해 관계자들이 각자가 할 수 있는 부분들을 잘 따져서, 하나씩 해결해 나갈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회로: 이후에 PM님이 <페미회로>를 만드셨는데요, <페미회로>를 처음 만들게 된 계기와 초반의 준비과정에 관해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PM: 처음에는 카이스트 페미니즘 모임 <마고>에서 먼저 연락을 주셔서 만났어요. 마고 분을 만나고 나니까 다른 이공계 대학에서는 페미니즘 모임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유니스트의 <오프코르셋>에도 연락을 해서 다 같이 만났어요. 사실 처음에는 연합단체를 만들려고 만난 건 아니었어요. 만나서 서로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만나서 얘기를 해보니까 문제가 너무 많고, 그 문제를 세 단체 모두가 안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문제들은 각자가 해결하기보다는 함께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순히 단체 간 연락망을 구축할 수도 있었죠. 하지만 각 단체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연락망 구축만으로는 제대로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 세 단체 모두 정기 행사가 없어서 모임을 하기도 힘들 것 같았고요. 마지막으로, 각 학교 내에서 페미니즘 단체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만, 학교들이 워낙 규모가 작고 인간관계가 협소하다 보니 실제로 단체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런 점들을 종합해 봤을 때, 연합단체를 만들기보다는 새 단체를 만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회로: 그럼 그렇게 <페미회로>가 만들어진 게 정확히 언제 쯤인가요?

PM: 2017년 2월쯤이에요. <페미회로>는 굉장히 빨리 성장한 편이에요. 초창기에 많은 사람이 일을 열심히 해준 덕분이죠. <걸스로봇>의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

회로: 그럼 연합단체를 만들자고 PM님께서 먼저 제안을 하신 건가요?

PM: 그건 다 같이 협의해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제가 말이 많아서 PM이 되었어요. 원래 말이 많으면 일을 많이 하게 돼요. (웃음)

회로: <페미회로>가 만들어진 초반에, 특히 3월에는 일이 많아서 힘들었을 것 같아요. <페미회로> PM으로 일하면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요?

PM: <페미회로>가 생각보다 너무 커져버려 힘들었죠. 처음에 생각한 인원은 한 스무 명 정도였어요. 시스템 정비도 안 되어 있었고, 프로그램도 서른 명이 일할 만한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들어온 거에요. 그래서 처음에는 진짜 상근처럼 일했어요. 하루에 네, 다섯 시간 정도? 제가 오전 수업밖에 없는 날이 있었는데, 그러면 저녁 먹기 전까지 <페미회로> 일을 했어요. 오후 수업이 있는 날이면 4시까지는 수업 준비를 하고 저녁 먹고 나서 또 <페미회로> 일을 했고요. 그렇게 살다 보니 잠을 너무 못 잤어요.

처음에는 PM으로서 일 조율을 잘하지 못했어요. 뭔가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무리를 되게 많이 했거든요. 회원들이 실망해서 나가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컸고요. 그때는 함께 쌓아 나가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마음에 일을 혼자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저만 일을 했던 게 아니라 초창기에 많은 분이 일을 되게 열심히 해 주셨는데 제가 그걸 못 봐서 오해를 하기도 했어요. 이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전반적인 시스템 정비도 많이 됐고요. 부PM분들도 있고 운영위원회도 생겨서 저도 많이 편해졌어요. 시스템이 차차 안정되고 난 후에는 단체 일부로서 일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어요. 아마 함께하는 사람들이 다 좋아서 그랬겠죠?

회로: 그럼 가장 처음에 <페미회로>를 시작할 때는 인원이 몇 명 정도였나요?

PM: 처음에 모인 사람은 7명이었어요. 그러고 나서 3월에 첫 회원 모집을 해서 30명 정도가 되었죠.

회로: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정말 인원이 많이 늘었네요. 그러면 <페미회로> 초기부터 지금까지 PM직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PM: 첫 총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포항이랑 대전에서 한 번씩 했거든요. 당시에 <페미회로> 때문에 많이 돌아다녔어요. 돈 아낀다고 버스만 탔는데도 교통비가 3월 한 달만 20만 원이 넘게 나왔어요. 그때는 한창 긴장하던 때라 힘든 줄도 몰랐어요. 지금은 총회를 하면 총회 전담팀을 따로 꾸리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고생했죠. (웃음) 고생은 많이 했지만, 그때는 그게 재미있으니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회로: PM님을 비롯해 많은 분이 수고해주신 덕분에 지금의 <페미회로>가 있는 것 같네요. 만약 페미니즘을 만나지 않았다면 PM님은 아마 다른 길을 걷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보면 인생의 방향이 바뀐 거잖아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변화가 어떻게 느껴지나요?

PM: 저는 굉장히 행복해요. 물론 미래의 저는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요. (웃음)

회로: 긍정적인 변화라니 정말 기쁘네요. 그럼 바뀐 진로에 대한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PM: 제 주변의 반응이요? 제 친구들은 정말 잘 어울린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역시 넌 실험실 체질이 아니라면서 너무 잘 어울린다고 했어요. 가족들은 아직 제가 뭘 하는지 잘 몰라요. 그냥 ‘이제 위험한 물질은 안 만진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어요. 한번은 계속 물어보길래, 그냥 “예전에는 연구소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면 이제는 어느 건물에나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라고 얘기를 했어요. 묘하게 맞는 말이죠. (웃음) 사실 저도 졸업하면 뭐 하는지 잘 몰라서 그래요. 아직 입학도 안 해서 뭘 공부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제가 행복하면 됐죠.

회로: 그렇군요. 그럼 혹시 PM님은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고민이 있나요? 전공과 관련해서 들을 수 있을까요?

PM: 고민은 크게 세 가지에요. 전공 관련해서는, 소수자를 향하는 시선과 나 스스로가 소수자라는 인식이 저의 연구에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어요. 저는 페미니즘이 시선과 입장의 문제를 다룬다고 생각해요. 누구의 시선으로 어떤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특히 누구의 입장이 반영되어야 하는가 등을 논하죠. 여러 논의를 접하면서 저 질문을 생각하는 연습을 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물론 안 될 수도 있고요. 사실 이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인 게, 제가 아는 게 없고 연구 주제도 없어요. (웃음)

회로: 그렇군요. (웃음)

PM: <페미회로>의 차원에서는, 지금까지 <이공계 내 성차별 아카이빙>이나 <젠더서밋 프로젝트> 등을 통해서 여러 콘텐츠를 만들었잖아요. 이제는 지금까지 만든 콘텐츠를 바탕으로 어떤 식의 말하기를 할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그 중 하나가 교육자료를 만드는 거예요. 예를 들어, ‘우리가 새내기 배움터나 고등학교에 간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거죠. 전문가가 아니니까 분명 서툴 거예요. 하지만 5년에서 10년의 차이를 두고 함께 살아가는 입장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각자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어떻게 우리는 교류할 수 있는지 등을 알면 앞으로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위치와 속도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저는 지역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하고 있고, 제가 있는 이공계 대학은 페미니즘이 주된 주제로 이야기되어왔던 곳이 아니에요. 그러다 보니 저는 늘 논의의 중심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있었어요. 이렇게 중심과 떨어진 곳에서는 당연히 이슈를 따라가는 속도도 느릴 수밖에 없고요. 한때는 급한 마음에 무리했는데 결국 다치게 되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내가 덜 다치도록 자기를 보호하면서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어요. 다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나를 깨야 그 안에서 새로운 게 돋아날 수 있기에 상처는 긍정적이고 필요하기도 해요. 하지만 상처가 걷잡을 수 없으면 사람이 죽는 것처럼, 운동을 할 때에도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야 저도 오래 할 수 있으니까요.

회로: 저는 가끔 SNS 상의 페미니즘 논의가 따라가기 벅찰 때가 있어요. 저희는 지역에 있고, 페미니즘 이슈를 따라가기 위해서 온라인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 서울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속도에 우리를 맞추려고 하면, 가끔 조급해지고 답답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PM: 그렇죠. 우리는 오프라인 기반이 없이 공부를 시작하게 된 사람들이니까요. 아무리 온라인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지만, 어느 정도 오프라인 접근이 되지 않으면 한계가 있죠. SNS에서 유명한 페미니즘 카페나 페미니즘 강의는 서울에서 많이 열리고요. 유튜브 강의는 영어가 많죠. 그게 다 언어 장벽, 교육 장벽, 지역 장벽의 문제죠.

또 서로가 의제를 느끼는 데에 차이도 있어요. 의제는 각자의 위치성을 반영하니까요. 제가 포럼이나 발표회에 갔을 때 가끔 느끼는 것이, 서울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지역을 도와주려고 하실 때가 있어요. 같이 한탄도 해주시고요. “지역은 좀 그럴 수 있겠군요. 지역은 좀 늦긴 하군요.” 그런데 저는 늦다, 도와준다, 혹은 서울을 중심에 두고 지역을 변수로 다루는 말들이 묘했어요. ‘중앙’의 언어가 이쪽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았던 문제도 있고, 모든 사람의 의제가 그렇게 한 방향으로 진행되지는 않잖아요. 한국이 서양의 페미니즘 계보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 것처럼요.

그리고 제가 이공계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때, “그건 직업 연구 쪽에서 이미 이야기가 많이 진행되지 않았나요?”라는 말에 화가 난 적도 있어요. 학술적으로는 이야기가 많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직접 그 현장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의 삶 자체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연구가 모든 삶을 담고 있지도 않고요. 지금 경험 얘기가 너무 많다고 하긴 하지만, 여전히 이야기가 되지 않은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회로: 10년 후의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PM: 예전에는 되게 계획적인 사람이었어요. 하루 계획, 일주일 계획, 한 달 계획, 1년 계획, 10년 계획을 다 짜고 살았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 속에서 전날 스케줄러에 적어 놓은 계획을 전부 스캔할 정도로요. 그런데 요즘에는 하루하루 편차가 너무 심해져서 미래를 그릴 수 없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모르겠어요. 음, 10년 후에는 아마 박사과정이지 않을까요? 박사과정 아니면 포닥이겠죠? (웃음)

회로: 개인적인 질문이긴 한데, <페미회로> PM을 종신직으로 가져갈 생각은 없나요? 진지하게 답해주세요. (웃음)

PM: 없어요. 대학원생이니까 공부할 거예요. (웃음) 사실 지금은 PM이 그렇게 일을 많이 하지는 않아요. 그냥 조율만 하는 정도? 그런데 저는 많이 지쳐서, 쉬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회로: 이제 드디어 마지막 질문이네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PM: 우리가 하는 일이 한 번에 모든 걸 바꾸려고 하면 너무 힘들어요. 시작점을 찾기도 힘들거니와 매번 이슈가 반복되는 것 같거든요. 사람은 소진되어 가는데 과연 무언가 변하고 있긴 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제가 가끔 우스갯소리로 여기가 바닥인 줄 알았는데 더 깊은 곳에 바닥이 있더라, 하는 말을 할 때 사실은 힘들어 하는 거에요.

제가 그렇게 분노와 무기력 사이를 왔다 갔다 할 때 낸시 프레이저의 <전진하는 페미니즘>이란 책을 접했어요. 임옥희 선생님께서 쓰신 해제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새로운 세대는 과거의 반복 속에서 ‘좀 더 낫게’ 실패함으로써 ‘좀 더 나은’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2]” 좀 더 나은 실패, 이 표현에서 엄청난 위로를 받았어요. 무기력과 분노가 아닌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고, 그리 큰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거든요. 그때부터 조금은 서툴러도 되고, 조금은 유연해도 되고, 조금은 즐겁게 나아가도 되지 않을까, 어쩌다 실패하더라도 그것을 딛고 더 나은 차이를 만드는 것을 꿈꾸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뭔가를 바꾼다는 건 개인의 수준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게 매우 많고, 그래서 힘든 일이에요. 그런데 더 나은 실패를 향해 나아가면 우리가 지금의 경험을 통해 다른 걸 더 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많은 단체가 그러하듯, <페미회로>도 언젠가는 맥이 끊길 수 있겠죠. 하지만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들, 심어 놓은 씨앗들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기억되면 좋겠어요. 물론 <페미회로>가 계속되면 더 좋지만요.

회로: 계속되어야 한다면 더 슬픈 거 아닌가요? (웃음)

PM: 아, 그런가요? (웃음) 의제는 계속 발굴되는 거니까요. 치열하게 고민하며 계속되는 것은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가 끝난 뒤에 ‘좀 더 낫게 실패하기’라는 말이 머리에 오랜 시간 맴돌았다. ‘빨간약’을 먹은 후 우리의 일상은 너무나 달라졌다. 이 전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쳤던 일상의 많은 일에도 매일 상처를 받고, 문득 돌아본 나의 과거 또한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달라진 나 혼자서 이 모든 것들과 맞서 싸우기에 나의 힘은 너무 미약하기만 하다.

하지만 우리는 서툴고 작을지언정 ‘좀 더 나은 차이’를 만들기 위하여 전진한다. 어쩌다 마주친 글, 지나가다 들은 말, 누군가의 작은 진심이 나를 바꾸었듯이 나의 한 걸음이 조그마한 변화가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일상의 많은 혐오와 차별에 맞서 싸우며 나아가는 모든 페미니스트에게 좀 더 나은 실패를 하고, 좀 더 나은 차이를 만들어 가자는 응원을 전한다.

 

[1] 빨간약이란 본래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소재로, 넓은 의미로는 ‘기존의 가치관을 바꿀 만큼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이게 만든 어떤 것’, 좁은 의미로는 ‘기존에 갇혀 있던 세계에서 뛰쳐나와 불편한 진실을 깨닫게 만든 어떤 것’을 뜻하게 된 말이다. 페미니즘적인 의미의 빨간약은 ‘여성혐오의 존재를 인정한 시점 또는 그 계기’ 즉 페미니즘을 뜻한다. / 페미위키, https://femiwiki.com/w/%EB%B9%A8%EA%B0%84%EC%95%BD

[2] 낸시 프레이저, <전진하는 페미니즘>, 임옥희 역, 돌베개(2017), 340쪽

Share.

About Author

Girls' Robot

댓글 남기기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