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tists∩Feminists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 XVIII: 물리학에는 장벽이 없는 것, 숭실대 정현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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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2일 대전에서, 국내 5개 지역거점 과학기술중심대학(DGIST, GIST, KAIST, POSTECH, UNIST)의 페미니스트 연합모임 <페미회로(영문명 FemiCircuit)>가 공식 출범했다. 페미회로는 이공계 내 젠더 불평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지속 가능한 페미니즘을 실천하려는 모임이다.
(페미회로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femicircuit)

페미회로에서는 2017년 연중 프로젝트로 이공계 내 여성 과학자, 연구원들과 우리 주변의 페미니스트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름을 얻었거나 얻지 않았거나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연구하고 고민하며 실천하는 이공계 여성 연구자들을 통해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보다 조금 뒤의 미래를 살펴보고자 했다.

이런 시도는 2018년에도 계속된다. 새해 첫 인터뷰이는 숭실대학교와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각각 일반물리와 과학사를 가르치고 있는 정현희 교수다. 그는 물리학 전공자이자 휠체어 이용자로, ESC(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물리학과 함께한 지금까지의 삶의 경로, 여성과학자로서의 이야기와 함께 휠체어 이용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과학기술연구현장의 공간 접근성 문제를 들여다 본다.

페미회로 인터뷰어는 강미량으로, 회로라고 표기했다. 물리학계 흔치 않은 여성 선배를 만나고자 앞선 인터뷰이였던 박인아도 참관했다. (http://girlsrobot.co.kr/scientists_feminists_16) 인터뷰이 정현희는 현희로 표기했다. 검수는 김한솔, 백부경(이상 가나다순)의 검수팀이, 최종 편집은 <걸스로봇>에서 나눠 맡았다.

 

회로: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현희: 정현희입니다. 물리학 박사를 받고, 모교인 숭실대와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각각 일반물리와 과학사를 가르칩니다.

회로: 일반물리와 과학사를 동시에 가르치다니 독특하네요. 과학사는 무엇을 중심으로 가르치고 계시나요?

현희: 제가 과학사 전공이 아니다 보니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제 주전공과 맞닿아 있는 물리를 중심으로 가르치게 되었어요. 물리학에서 역사적인 실험들을 알려주는 것이죠.

물리학의 역사를 차근히 따라가다 보면, 열정과 호기심으로 연구하고 그 성과를 차곡차곡 기록으로 남긴 성실하고 거짓 없는 과학자들을 만날 수 있어요. 이런 면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요. 단 한 줄의 공식일지라도 무수한 시간과 열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요. 이를 통해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어요.

회로: 그렇군요. 전공이 이론물리쪽 이라고 하셨는데, 혹시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어떤 경로로 선택하셨나요?

현희: 석사 때는 광물성학 실험이라는 분야를 선택했어요. 광물성학은 빛을 이용해서 물질의 성질을 파악하는 학문이에요. 레이저로 물질의 성질을 본 다니 신기하잖아요. 당시엔 홀로그램이 너무 재미있어서 혼자 공부하던 때라 직접 레이저를 다룰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죠. 그래서 광물성학 연구실로 들어갔는데, 바깥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직접 연구실 생활을 하는 건 엄청 다르더라고요. 연구를 하려면 교수님과 케미(*케미스트리)가 맞아야 하는데, 교수님과 사이가 안 좋았어요. 교수님께서 실험을 못하게 하셨거든요.

회로: 실험 연구실인데 실험을 못하게 하셨나요?

현희: 제가 숭실대에서 학위를 했는데, 당시 아르곤 레이저가 서울대와 저희 연구실에만 있었다고 해요. 지금이야 피부과에도 있을 정도로 흔하지만 그때는 비쌌거든요. 그런데 너무 비싸니까 교수님이 못 만지게 하는 거예요. 학기 중에는 박사 과정 선배들이랑 방학 때 실험할 단결정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방학 2주, 교수님 선배가 실험실에 올 때만 레이저로 실험을 할 수 있었지요. 그 교수님이 하는 실험을 눈으로 보는 거였죠. ‘아, 저렇게 빛의 경로를 맞추는구나’ 하면서요. 석사 2학기가 다 지나도록 실험을 못하니 너무 답답했어요.

또, 교수님께 질문을 드려도 답을 안 해주시고 시킨 것은 다 했냐는 말만 하셨어요. 그때 맡은 일이 결정을 만드는 거였는데, 결정이야 차곡차곡 쌓이는지 보기만 하면 되거든요. 시키는 거 했냐, 하시면 잘 쌓이고 있던데요, 대답하고. 질문을 드리면 필요 없는 거라면서 답은 안 해주고. 이건 아니다 싶어서 3학기 끝나고 나서 캐나다에 있는 이모네 집에 가서 6개월 동안 놀았어요. 실컷 놀고 나니까 공부가 다시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마저 한 학기를 하고 연구실을 바꿔서 박사 과정에 진학했어요. 석사 때 교수님과 안 좋게 끝났죠.

회로: 박사 때 연구실을 바꾸셨다고 하셨는데, 새 연구실을 어떻게 선택하셨나요? 특별히 그 연구실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는지 듣고 싶어요.

현희: 대학원 4학기 때 들은 고체물리 수업이 계기였어요. 새로 오신 교수님이셨는데 학부 때와는 다르게 수업을 재미있게 하셨어요. 차근히 설명해주시고, 질문도 잘 받아 주시니 공부가 즐거웠어요. 원래 제 성격이 과제 10문제 중 6문제만 풀어도 열심히 했다, 하면서 끝내는 타입이에요. 그런데 고체물리 수업 과제는 다 했고, 복습까지 했어요.  모르는 게 있으면 이것저것 찾아보고 질문도 해가면서 끝까지 했죠. 어려운 문제를 딱 풀었을 때 느끼는 희열에 중독되더라고요.

그 때 이 분 밑이라면 공부를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침 석사 지도 교수님 정년이 1년밖에 안 남았던 터라 그 연구실 박사과정으로 진학해도 후에 교수님을 바꿔야 했어요. 어차피 사이도 좋지 않았으니 박사 과정에 진학한다면 다른 연구실에서 해도 괜찮겠다 생각했어요. 그렇게 새 교수님의 전공인 초전도이론으로 박사 과정을 시작하게 된 거죠.


회로:
 바꿀 때 석사 지도교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현희: 나중에 석사 지도교수님이 서운해 하셨어요. 본인에게 이야기를 안 하고 바꿨다고요. 그때 저는 석사를 졸업하면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나름 생각해서 바로 진학을 안하고 6개월을 쉬고 박사에 입학하기는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본인이 가르치던 학생이 박사과정에 입학했다는데 본인 랩이 아닌 것이 당황스러우셨을 듯해요. 우선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안 한 제 잘못이죠.

어쨌든 박사 지도교수님인 김희상 교수님 밑에서 공부를 새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석사과정 3명이 있었던 랩에 저랑 후배가 박사과정으로 들어갔어요. 신생 연구실이라 분위기가 활기찼고 학생들도 다들 으쌰으쌰 했죠. 무엇보다 교수님이 너무 좋았어요. 밥도 사주고, 학생들도 잘 챙겨주고, 랩 미팅도 정성스레 진행해 주셨으니까요. 재미 붙인 덕분에 사고를 당하기 전인 첫 6개월 동안 밤 늦게까지 남아서 연구를 할 정도로 열심히 했었어요.

회로: 그렇군요. 후에 다시 돌아오기로 하고, 잠깐 페미니즘 이야기로 넘어 가 볼게요. 인터뷰에 응해주신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현희: 네, 몇 번 페이스북에 공유도 했어요. 인터뷰가 장애보다는 여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인터뷰를 읽으면서 제가 너무 이런 문제들을 겪지 않고 편하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경험이 없다는 건 그 자리를 치열하게 지켜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거라고 생각해요. 반성을 많이 했어요. 여성이 과학계에서 겪을 만한 좌절 등을 피하면서 살았나 싶어서요.

그래서 처음에 인터뷰 요청을 받았을 때는 ‘내가 인터뷰를 할 만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정말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았지, 딱히 특별하게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얘기가 없다고 느꼈거든요. 저를 드러내기 무섭기도 했어요. 순전히 인터뷰어의 끈질긴 설득 때문에 응하게 됐어요.

회로: 혹시 물리분과 성비를 여쭈어도 될까요? 연구를 하거나 가르치면서 여성이 수적∙사회적 소수자라는 사실을 자각했던 경험이 있나요?

현희: 제가 물리의 전 분과를 아는 게 아니어서 제 경험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소수자라는 사실을 자각했던 경험은 여러 번 있었어요.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일인데요. 선배들이 OT를 하면서 출석을 불렀는데, 제 이름을 빼고 넘어가더라고요. 정씨를 거치지 않고 최씨로 넘어간 거죠. 그래서 아, 내가 빠졌나 보다, 이야기 해야겠다, 했는데 홍씨가 끝나고 여자가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까 여학생들을 전부 뒤로 뺀 거죠. 이름하고 학번 모두요. 제가 여학교를 나와서 가나다가 아닌 성별 순으로 이름이 배치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정원 50명에 여자 10명이 뒤에 있었어요. 남학교에 몰래 들어가는 여자도 아닌데,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1991년도였어요. 요즘엔 안 그러죠?

회로: 네. 저도 제 학번이 제일 빨라요. 요즘엔 여자 남자를 따로 부르지도 않고, 여자를 뒤로 빼지도 않죠.

현희: 또 다른 일화로는, 공대 물리학과는 남학생이 많잖아요. 고3 때 물리학과에 진학하고 싶다고 하니까 친구가 ‘남자 많은 데 가서 남자 꼬시려고 하냐’는 거에요. 저는 그 당시 학력고사에서 화학 대신 물리를 선택해서 문제를 풀다가 재미있어서 물리학과를 가고 싶었지, 그곳에 남자가 많을 거란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되게 웃겼어요. 선배들이 이번에는 여학생이 많다고 자랑하는 것도 되게 이상하게 들렸고요.

제가 대학교 3학년 때는 대학원 박사과정에 여자 선배 두 분이 있었어요. 그때 한 랩에 두 명은 굉장히 많은 수였어요. 그래서 그 랩에 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석사 때 갔던 물리학회에서는 여자를 찾아보기도 힘들었고요.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대학원에 여후배가 들어와서 물리학회에 다시 간 적이 있는데 그때는 의외로 많았어요. 바뀌고 있는 거죠.

회로: 그렇군요. 물리학계에 여학생이 조금씩이나마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아직 부족하긴 하지만요. 재직하고 계신 대학의 학과 내 여자 선생님의 비율은 얼마나 되나요? 여학생은 늘었는데 여교수의 비율은 어떨지 궁금해요.

현희: 지도교수님 사모님도 물리를 전공한 뒤 강사로 일하다 숭실대에 강의 전담교수로 오셨어요. 외국인 교수에 저까지 세 명이에요.

여교수가 있으니 물리학과 내에서는 여학생들이 바라볼 곳이 생긴 것이죠. 롤모델이라고 하나요? 그 즈음부터 물리학과에 여성이 있는 게 자연스러워졌어요. 세 명 중 한 명은 물리학과 전공수업을 하고 나머지 두 명은 일반물리만 강의하고 있어요. 세 명 다 정규직이 아니라고 알아요. 하지만 연구 실적이 좋아서 계속 학교에 남아 있지요.

회로: 현희님 자체가 학생들에게 귀감이 될 것 같아요. 원래는 어떤 롤모델이 되고 싶었는지 묻고 싶었는데, 반대로 여쭤보고 싶어요. 혹시 지금 롤모델로 삼는 분이 있나요? 박사 이후의 분들이 어떤 식으로 삶을 꾸리고 목표를 설정하는지 듣고 싶어요.

현희: 김남미 교수님과 이화여대 이공주복 교수님이요. 김남미 교수님께서 WIST(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WISET의 전신) 강연을 추천하셨고 그 곳에서 이교수님을 만났어요. 김남미 교수님은 거의 제 지도교수님이나 마찬가지인 분이세요. 학위 도중에 배움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학위가 끝난 후에도 지도교수님과 같이 연구에 대한 논의를 많이 했어요. 누구는 지도교수가 2명이면 힘들지 않냐, 하는데 저는 두 분의 스타일이 달라서 오히려 더 좋았어요.

지도교수님인 김희상 교수님은 저를 성별이 없는 무성의 학생으로 대하셨어요. 여학생이라기보단 장애학생이라 교수님의 배려가 심했죠. 커피도 내려 주시고, 랩 미팅할 때 교수님이 움직였어요. 잡일은 학위 기간 중 딱 한 번 했어요. 학생들 과제 제출 여부 확인이었어요. 제가 봐도 너무 바쁜 교수님이 먼저 부탁해서 제가 다 고마웠어요. 그런데 김남미 교수님은 제가 여자라는 점을 더 걱정하셨어요. 본인이 여자니 여성 과학자가 학계에서 겪는 어려움을 알았던 거죠. 그래서 WIST의 센터장이셨던 이공주복 교수님을 소개해주셨어요.

학회가 아닌 바깥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여자를 그 때 처음 만났어요. WIST 강연장에 가보니 저와 이공주복 교수님, 그리고 석사생 한 명, 그렇게 물리를 전공한 사람이 딱 세 명이더라고요. 생물학 전공자들이 한 80% 정도 되었고 나머지는 화학 전공자였어요. 그래서 몇 안 되는 물리학 전공자들이 그렇게 반갑더라고요. 그런 자리에 가서도 여자가 물리를 전공했다고 하면 신기해 하거든요. 저는 물리를 전공한 ‘여자’라는 사실을 딱히 자각하고 살지 않는데, 밖에만 나가면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니까요. 물리가 여자에게만 어렵나요? 모두에게 어렵지요. (웃음)

회로: 확실히 두 분의 스타일이 달랐겠네요. 아까 이공주복 교수님도 롤모델이라고 하셨는데, 이공주복 교수님의 어떤 면모에 끌렸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현희: 보통 물리를 전공하면 강의를 하는 교수나 연구원 둘 중 하나가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교수를 하면서 여성 과학자를 위해 이런 저런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게 충격이었어요. 굉장히 완벽하고 활동적인 분이에요. 집안일도 하고, 아이도 기르고, 강의하고, 연구하고, 사회활동까지 다 하니까요. 또 제가 대학원 때 원서 말고 한국어로 된 물리 전공책을 모았었는데 그 책 중 한 저자가 그 교수님이셨어요. ‘이공주복’이라는 이름이 특이하고 드물잖아요. 그래서 이 분이 혹시 그 분인가? 하고 여쭤보니 맞더라고요. 저자를 만난 거죠. 그 모습을 보면서 아, 물리를 한다고 해서 꼭 연구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구나, 책도 쓰고 다른 일도 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회로: 그렇군요. 그러면 이공주복 교수님 같은 삶을 추구하시나요?

현희: 이게 좀 애매한 게, 사람들이 롤모델이라고 하면 걸크러쉬를 상상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걸크러쉬 타입은 아니에요. 이공주복 교수님만큼 김남미 교수님도 대단하신 게, 집안일도 하고, 강의 전담이니까 1주일에 2시간짜리 강의를 6개 정도 맡아서 하고 계세요. 그 와중에 연구실적도 꽤 좋으시고요. 저 정도 강의 시수면 빈 시간이 정말 없을 텐데도 말이에요.

이공주복 교수님은 물리학을 공부하는 후배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시는 롤모델, 김남미 교수님은 강의를 하면서도 연구를 할 수 있다고 보여주신 롤모델이에요. 그런데 제가 이공주복 교수님이나 김남미 교수님처럼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걸리는 게 너무 많아요. 그 분들은 결혼을 하셨고 나처럼 몸이 불편하지 않으니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롤모델을 따라갈 엄두가 도저히 안나더라구요. 그래서 나만의 무언가를 스스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회로: 그렇군요. 그럼 이제 아까 넘어갔었던 부분으로 다시 되돌아갈게요. 박사과정에 입학하고 6개월 후에 사고를 당하셨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크게 다치셨던 것으로 아는데, 박사과정으로 돌아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실 수 있나요?

현희: 새 교수님 밑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고 한 학기 끝날 즈음에 사고로 다쳤어요. 그 후 3년을 고스란히 쉬었어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죠. 물리치료를 받으러 병원에만 다녔어요. 가끔 앰뷸런스에 실려가기도 했고요. 사고를 당하고 첫 6개월 동안은 병원에서 생활했어요. 거의 잠만 잤어요. 6개월 뒤에는 집에 와서 그냥 다치기 전에 보던 논문이랑 전공 서적도 뒤적여보고 그랬는데, 뭐하는 짓인가 싶었어요. 그래서 그 뒤 2년은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게임을 하거나 소설만 읽었어요. 그동안 모아 놓은 책들과 판타지, SF 위주로 구입해서 읽었어요. 그때 반지의 제왕과 얼음과 불의 노래, 만단검 시리즈를 2-3번씩 반복해 읽었어요.

그렇게 3년을 쉬니까 학교에서 연락이 오더라고요. 학교에 다니거나 그만두거나 해야 한대요. 그래서 그만두려고 연구실에 짐 정리를 하러 갔었죠. 근데 하필이면 딱 그 날 박사 지도교수님과 마주쳤어요. 안부를 묻다가 대뜸 제가 왔으니 자리에 컴퓨터를 마련해 주겠대요. 마침 자기가 새 컴퓨터를 샀으니 그걸 절 주고 교수님 컴퓨터는 다시 산다는 거에요. 그 말씀을 듣고 순간 멍해졌다가 네, 해버렸어요. 짐을 정리하러 간 건데 그렇게 박사과정을 다시 시작하게 된 거죠. 컴퓨터에 엮인 거죠. 그래도 석사 지도 교수님이셨다면 이런 제안을 해주지도 않으셨겠죠.

휠체어를 타고 학교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어요. 통학은 동생이 운전을 해서 도와주었죠. 매일 학교에 나갈 수는 없었어요. 3년 동안 병원만 다니다가 갑자기 학교에 다니려니 하루만 갔다 와도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더라고요. 연구를 지속하기 힘들었죠. 교수님도 3년을 쉬어 힘들 거라고 말하셨어요.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힘들더라고요. 사고 전에는 원서를 봐도 하루만 집중하면 한 단원쯤은 무리없이 읽을 수 있었는데, 쉬고 나니까 4시간에 한 페이지를 읽는 정도였어요.

회로: 듣기만 해도 많이 힘드셨을 것 같아요.

현희: 힘들어서 눈물이 나던 때였어요. 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전신 마취때문에 기억력이 떨어졌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너무 힘들어서 계속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어쩌겠어요. 컴퓨터를 받았잖아요. (웃음) 힘들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연구실에 나가면서 연구를 지속했어요. 그렇게 한 학기를 다니고 나니 좀더 공부를 해야할 것 같아서 그 다음 학기에는 집에서도 논문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5~6년을 코스웍하면서 1년 반 동안의 공백기를 보충했어요.

회로: 집에서 통학을 하셨다고 했는데 통학 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현희: 중간에 분당으로 이사를 갔어요. 학교에서 멀어 진 거죠. 그런데 다니기 더 편했어요. 새로 이사 간 아파트에는 경사로가 있었거든요. 예전 아파트에는 입구에 계단이 4개가 있었어요. 휠체어 이용자가 혼자 다닐 수 없는 구조였죠. 저는 몸도 무거우니 도와주는 사람도 힘들었을 거에요. 그런데 새로 이사간 집에는 경사로가 있으니 나다니기가 편한 거에요. 그렇게 동생과 마트나 학교에 가기 시작했어요. 동생이랑 처음으로 자동차 극장에도 가보았고요. 그 경사로 덕분에 닫혔던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어요. 사고 이후 즐기지 못했던 것들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니 공부가 뒷전으로 밀려나더군요. (웃음)

회로: 분당 아파트가 접근성이 좋았네요. 접근성 문제는 휠체어 이용자에게 정말 중요한 부분이죠.

현희: 그 계단 4개가 중요했던 거에요. 계단 4개가 사람을 얼마나 답답하게 만들 수 있는지 체감했던 순간이었어요. 또 그렇게 느릿느릿하게 학위를 했던 이유 중 하나는 학위를 끝내고 난 뒤의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학위를 끝내고 취업할 생각이 없었던 거죠. 저는 학위를 끝내는 것 자체가 목표였어요. 학위를 따도 이 몸으로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할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밖에 오래 있지 못하니까 부모님 그늘 아래에서 공부만 할까 생각했던 시기였어요.

회로: 지금은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변화의 계기가 있나요?

현희: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세상이 달라졌어요. 무얼 해도 아버지가 저를 보호해 주셨는데, 든든한 보호막이 벗겨진 것이죠. 그때 확실히 뭔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연구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죠.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였어요. 당시에는 강사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박사과정 학생들이 으레 강사를 하곤 했어요. 저도 박사과정생이니까 원래는 했어야 했는데, 몸이 불편하니 과에서 따로 물어보지는 않더라고요. 저도 따로 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요. 하지만 이때는 과에 제가 먼저 연락해서 하겠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실험 수업으로 시작했어요. 다들 이론 수업이 더 편하지 않냐고 물었는데, 이론 수업에서는 휠체어 높이와 맞지 않는 칠판을 써야 해서 더 어렵거든요. 앉아서 수업을 하면 공간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칠판의 반도 못 쓰는 거에요. 마침 물리 실험실이 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는 새 건물로 이전했기 때문에 더 편하리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실험은 학생들이 직접 하는 거니까요.

회로: 강사를 하셨을 때 첫 느낌이 어땠나요?

현희: 편하게 하려고 실험 수업을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사람들과 접촉이 늘어나서 재미있는 것도 있었지만, 학부 1학년 학생들의 신선함, 생기, 순진함이 좋았어요. 욱 하면 움찔, 하다가 얘들아~ 하면 씩 웃고. (웃음) 숭실대 학생들이니 전부 후배여서 정이 가기도 했고 아이들도 열심히 했어요. 그런 교류 속에서 취직보다는 강사 쪽으로 진로를 굳혔어요. 매일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게 아니라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유연하게 할 수도 있고, 돈도 벌 수 있으니까요. 저에게 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집에만 있지도 않고 전공도 살릴 수 있고, 얼마나 좋아요.

물론 교수님은 박사 졸업할 때쯤 되니 이곳 저곳에 원서를 넣으라고 슬쩍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네, 하고 대답만 드리고 하지는 않았죠. 그러면 안 됐는데, 그때는 과연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싶었어요. 숭실대에서 주는 수업으로도 먹고 살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고요. 제 지도교수님은 제가 굳이 하지 않는다는데 막 찔러서 뭔가를 하라고 강요하는 분이 아니세요. 너도 학위를 받고 박사 소리를 들을 텐데, 진로에 관해서는 자신이 뭐라 할 수 없고 옵션만 줄 수 있다고 하셨죠. 그래도 몇 번이나 연구소쪽으로 취업을 하라고 압박같지 않는 압박을 주셨어요. 제가 교수님 말씀을 잘 듣는 학생은 아니었고 교수님은 그런 저를 타박하지도 않으셨어요. 교수님의 말씀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은 다하면서 학위 기간을 보냈어요.

회로: 이야기를 들으니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나신 듯해요. 인생의 결정을 지지하고 조언을 줄 수 있는 분들요. 또,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현희님께서도 저를 포함한 다른 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시고요.

현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학을 행하는 공간의 접근성 문제가 생각났어요. 저는 여러 차원의 공간 접근성 문제에 관심이 많아요. 보통 과학의 수혜자로 여겨지는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소수자들이 과학 연구를 직접 하려고 하면 맞닥뜨리는 장벽이 많지요. 제도적 차원의 장벽도 있고, 물리적 차원의 장벽도 있고요. 특히 휠체어 사용자에게는 물리적 장벽이 크게 작용할 것 같은데요. 저희가 다니고 있는 포스텍만 해도 휠체어가 다니기에는 경사로가 너무 높거나, 경사로가 너무 가에 있어서 휠체어를 회전하기 힘들거나, 경사로는 있지만 안전바가 없어서 오르기 힘들거나, 건물의 엘리베이터가 너무 좁아 휠체어가 들어가기 힘든 경우도 있어요. 포스텍 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아직 배리어 프리(barrier-free)한 공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아요.

혹시 이제까지 거쳐오셨던 공간의 접근성은 어떠했는지, 당사자로서 어느 부분에 개선이 필요할 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현희: 제 경험으로는 학교의 접근성이 그나마 나은 편이에요. 처음에는 지도교수님께서 학회에 같이 가자고 말씀을 안 하셔서 서운했어요. 그런데 학회장이나 세미나에 혼자 가보니까 정말 힘들더군요.

KIAS에 세미나를 들으러 가서 겪은 일이에요. 정문에 경사로 없이 계단만 있어서 정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뒷편 경사로로 들어갔어요. 거기까지는 괜찮다 싶었는데, 문제는 장애인 화장실이 없더라고요.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1층에 구석진 데에 하나 있더라고요. 매 층에 있는 게 아니라 그 하나가 전부였어요.

문제는 쓰기가 너무 힘들다는 점이었어요. 화장실 문이 미닫이였는데, 휠체어 사용자들은 미닫이 문을 쓰는 게 어려워요. 계단 바로 옆에 급조했다고 느꼈죠. 직원에게 툴툴대니 직원이 건물 층마다 여자화장실이 생긴 것도 몇 년 전이라고 말해주더라고요. 지금 그 건물은 오래되어 고치기가 힘들어요. 그 건물을 경험하고, 다른 연구소를 떠올리니 역시 학교에서 강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고요. 강의하러 다니는 건물에는 그래도 장애인 화장실이 하나씩은 있는데, 다른 곳에 가면 정말 찾기 힘들어요. 건물에 화장실이 하나도 없는 데가 많아요. 그때 왜 교수님이 나를 안 데리고 다니는지 이해하게 되었어요. 너무 힘드니까요. 대전 학회에는 보내준 이유가 어머니가 있어서 숙소도 편하고 전반적으로 주차하기 쉬워 이곳 저곳 다닐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 이외에는 혼자 가기 힘들어요.

회로: 장애인 화장실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성별을 나눠 놓지 않거나 화장실 물품 창고로 쓰는 경우도 있죠. KIAS 말고 다른 곳에 혼자 가보셨나요? 예전에 포스텍에서 잠깐 머무셨다고 들었는데요. 또, ESC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계시고요.

현희: 제가 1998년도 12월에 다치고 나서 처음으로 집 밖 호텔에서 잔 게 2012년 학회에 갔을 때였어요. 원래는 가지 않았는데, 여자 후배가 새로 들어왔다고 해서 평창 휘닉스 파크까지 갔죠. 가기 전에 고양이에게 밥을 많이 주고, 마음 먹고 1박 2일 동안 갔어요. 다니기가 정말 쉽지 않았어요. 세미나장이랑 포스터 발표장이 건물이 분리되어 있어서요. 그 이후에는 한동안 또 감히 갈 생각을 못 하다가, 작년 5월에 포항에 일주일 동안 있었어요. 그 일주일이 처음으로 누군가를 동행하지 않고 오로지 혼자 외박을 했던 때였어요. 생각보다는 해볼 만 했어요. 화장실이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국제관에서 먹고 자고 했으니 괜찮았어요. 국제관에는 장애인 화장실이 1층에 있잖아요. 엘리베이터도 크고요. 국제관에서 숙식하고 2층에서 세미나를 들으며 지냈던 일주일이었어요. 그러다가 밥을 먹으러 갈 때는 차를 가지고 나가거나 학교 안에서 먹었고요.

그런데 학교 안에서 먹기가 참 힘들었어요. 학생식당 2층은 다니기 불편해서 사용할 수가 없으니까 1층에 있는 연지에서 먹었어요. 이마트에 가서 음식을 한 번에 많이 사 오기도 했고요. 또 포스텍이 길을 찾기 힘든 구조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혼자 다니기에 경사가 좀 애매해요. 갈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막상 올라가려면 어려운 경사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다가 다른 분의 도움으로 올라가는 경사랄까요.

회로: 그 말고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경사로도 많죠. 경사로 앞에 주차를 하는 경우도 있고요. 혹시 기억나는 건물이 있나요?

현희: 아태물리센터(*무은재 건물)에 혼자 갈 때 본부 쪽에 주차하고 건물 앞에 갔더니 엘리베이터는 옆문으로 가야하고, 그 옆문으로 가려면 계단으로 내려가야 하는 경로라서 너무 힘들어서 울 뻔했어요. (웃음) 겨우 아태물리센터가 있는 건물과 다른 건물 사이에 겨우 차를 대고 간신히 1층으로 들어갔는데, 엘리베이터가 너무 좁았어요. 휠체어 하나가 겨우 들어갈 크기였어요. 회전도 못하고 들어간 그대로 나왔어요. 그러면서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게 어디냐, 라고 생각했어요. 오고 가는 게 완전 불가능한 상태는 아니니까요. 이렇게 한 번 해보니 욕심을 내서 여기 저기 다니기 시작했어요. ESC 행사도 그렇게 가는 거고요.

 

회로: 아직 개선이 필요한 점이 많네요. 지금 말씀해주신 부분들은 학교 리모델링을 할 때나 학회 장소를 선정할 시에 꼭 고려해야 할 점들이네요.

이제 끝날 때가 거의 다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요?

현희: 제가 인터뷰를 통해 남기고 싶었던 말은 거창한 게 아니었어요. 그런 걸크러쉬를 주지 못하기도 하고요. (웃음) 우리는 항상 성공한 케이스만 들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들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살고 있는 삶에 딱 들어 맞지 않으니까요. 그냥 대단하다, 하고 끝나는 거죠. 저는 차라리 실패한 이야기를 듣고 타산지석으로 삼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자기 삶에 맞춰가는 거죠. 실패라기보다 포기하는 삶에 익숙하다 보니 저 자신이 성공 신화에 상처를 받기도 했어요.

다 닥치는 대로 해보세요. 너무 고민만 하지 말고 일단 하세요. 주차가 번잡한 건물로 갈 때 주차를 못 할 것 같다고 긴장하다가도 거짓말처럼 자리가 있을 때가 있어요. 우선 부딪혀봐야 이게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알 수 있어요. 열 번 부딪혀서 걸리면 좋은 거고, 아니면 뭐 할 수 없는 거죠. 이런 게 사는 거 아닐까요? 일단 부딪혀봐요.

저는 아직도 새로운 장소를 가거나 새로운 일을 하기 전에 많은 고민을 하다가 숨기도 해요. 그러나 예전에 하고 싶은 일을 열 개 중 한 개만 했다면 지금은 열 개 중 대여섯 개는 하고 있으니 좀 발전을 한 거겠죠?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

회로: 오늘 인터뷰를 통해서 많이 배웠네요. 물론 배리어 프리하지 않은 공간처럼 세상에는 사회구조적으로 비판할 지점이 분명 있지만, 그것을 마주하면서도 어떻게 부딪히고 긍정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본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약 한 시간 반 동안의 화기애애했던 시간이 끝났다. 정현희 교수의 모습에서 후배 과학자와 학생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서로의 인생을 긍정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다. 일단 부딪혀봐야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알 수 있다는 그의 말에 힘입어, 오늘도 후배들은 서툴지만 힘차게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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