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tists∩Feminists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 XV: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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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2일 대전에서, 국내 5개 지역거점 과학기술중심대학(DGIST, GIST, KAIST, POSTECH, UNIST)의 페미니스트 연합모임 <페미회로(영문명 FemiCircuit)>가 공식 출범했다. 페미회로는 이공계 내 젠더 불평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지속 가능한 페미니즘을 실천하려는 모임이다.
(페미회로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femicircuit)

페미회로에서는 2017년 연중 프로젝트로 이공계 내 여성 과학자, 연구원들과 우리 주변의 페미니스트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이름을 얻었거나 얻지 않았거나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연구하고 고민하며 실천하는 이공계 여성 연구자들을 통해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보다 조금 뒤의 미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UNIST 페미니즘 소모임 <오프코르셋> 회원이자, <페미회로>의 부PM으로 일하고 있는 조희수씨를 만나봤다. 이공계 특성화 대학이라는 환경 속에서 공개적으로 페미니즘 활동을 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속에서 희수 씨는, 아직 학부생 신분이지만 그 누구보다 적극적인 페미니즘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희수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 주변 또래 페미니스트의 고민과 이야기들을 최대한 담아내고자 했다.

<페미회로> 인터뷰어는 신연주, 백부경, 김정후로, 회로라고 표기했고 인터뷰이 조희수는 희수로 표기했다. 검수는 강미량, 김한솔, 이아령 (이상 가나다순)의 검수팀이 맡았다. 최종편집과 발행은 <걸스로봇>이 담당했다.

 

회로: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희수: 안녕하세요, 저는 UNIST 생명과학과에 다니고 있는 14학번 조희수입니다. 1년 정도 휴학을 해서 아직 3학년이예요. 과학사나 과학철학 쪽으로 진로를 생각해서, 휴학 기간 동안 그 쪽 공부를 했습니다. 지난 3월 <페미회로>를 만나 활동을 시작해 6월부터 <페미회로> 부PM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회로: 신분을 드러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인터뷰를 하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있나요?

희수: 원래는 제가 다른 분을 인터뷰 하려고 했는데, 약간 낚인 것 같아요. (웃음) 사실 처음에는, 저를 인터뷰 한다고 하시길래 당황스럽고 걱정도 됐는데요. 제가 3월달부터 했던 활동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냥 UNIST에도 이런 사람이 있구나, 누군가 글을 읽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회로: 먼저 희수씨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네요. 언제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졌나요?

희수: 제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진 건 작년 여름 즈음이에요. 그때 과학사학자인 론다 쉬빈저의 <Nature’s body>라는 책을 읽고 과학사에서 여성이 어떻게 소외됐는지, 그리고 남성 중심적인 과학의 구조가 과학 지식을 어떻게 왜곡했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요, 그 책의 내용을 읽고 교수님과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아무래도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다 보니 상대적으로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죠.

사실은 저도 그 전까지는 여성으로서 내가 어떤 어려움이나 불편함을 겪는 지 별로 자각하지 못했어요. 가부장적인 문화 아래서 자랐고, 성희롱, 성폭력 피해자인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요. 저희 어릴 때 한창 ‘된장녀’라는 말이 유행했잖아요. 저는 남에게 그런 식으로 욕먹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개념녀’가 되려고 엄청 노력했던 것 같아요. 실력만 있다면 여자인 게 뭐 대수냐고, 여성가족부 따위가 있어서 오히려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했어요. 여중, 여고를 나와서 남자 애들과 직접 비교당할 일도 없었고, 대학교 와서도 운 좋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그런 발언들로부터 그나마 자유로운 편이었죠. 그렇다 보니 좀 무뎠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 그런 경로로 페미니즘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저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데 좀 더 시간이 걸렸을 거예요.

그렇게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나서도 활발히 활동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천천히 칼럼이나 여성주의 저널인 ‘일다’에 나오는 글을 많이 읽었어요. 그러다가 3월에 <페미회로>를 만나서 본격적으로 페미니즘 활동을 시작했죠. 동시에 <오프코르셋>도 가입을 했고요.

회로: 그렇다면 <페미회로>나 <오프코르셋>과 같은 페미니즘 단체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나요?

희수: <페미회로>는 아는 분께 소개를 받아서 들어갔어요. 그 때 면접 인터뷰를 하신 분께서, <페미회로>는 활동을 주로 하는 단체니까 혹시 페미니즘 공부를 하고 싶다면 <오프코르셋>에 들어와서 같이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건 어떻겠냐고 하셔서 <오프코르셋>에도 들어가게 됐어요.

회로: 이제 학교 이야기를 좀 해볼게요.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와 생명과학과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희수: 저는 원래 생명과학 분야 중에서도 진화학이나 생태학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재수하기 전에는 UNIST가 학과 개편이 되기 전이라 생명과학과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 학교를 크게 고려하지는 않았죠. 재수를 하던 중에, UNIST에 먼저 온 고교 친구가 생명과학과가 새로 생긴다고 귀띔을 해줘서 지원했어요. 막상 와보니까 제가 하고 싶은 진화론이나 생태학 쪽 분야는 이 곳에서 하기가 힘들더라고요. 원래 생물철학 쪽에도 관심이 있었어서, 자연스럽게 다른 길(과학철학이나 과학사)을 생각하게 됐어요.

회로: UNIST는 이공계 특성화 대학이라는 점, 지리적으로 외진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 등에서 사실 일반 대학과는 분위기나 특성이 좀 다르다고 알고 있어요. 희수 씨가 대학 오기 전과 비교했을 때, 직접 느끼는 차이점이 있나요?

희수: 여중, 여고를 나와서 그런지 처음 학교에 왔을 때는 남자가 너무 많아서 적응이 안됐어요. (웃음) 뭐, 그게 그냥 낯설어서 생기는 문제라면 적응하면 되지만, 사실 여성의 수가 적다는 데서 다른 문제들이 많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너무 소수다 보니까 공부, 연애, 활동 등 일상 생활에서, 평범한 동료가 아니라 ‘여성’ 자체로 여겨지는 순간이 있어요. 저는 그나마 괜찮았던 게, 제가 재수생이라서 다른 동기들보다 한 살이 많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나이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서 그나마 제 목소리를 더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동갑 여자가 하는 말과 누나인 제가 하는 말은 당연히 다르게 느껴질 테니까요.

제가 2학년 때 동아리 회장을 했는데, 사실 여자 비율이 되게 높은 동아리인데도 제가 들어가기 전까지 여자 회장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저희가 다른 동아리들과 체육대회를 했어요. 그런데 맨 처음에는 너무 당연하게 축구만 했어요. 남자들은 축구를 하고, 여자들은 가서 응원을 하고. 근데 응원을 해야 되는데 여자애들이 안 와요. 당연하죠, 자기가 뛰는 것도 아니고 남 응원만 하는데 재미가 없잖아요. 근데 여자애들이 응원을 안 나오면 “어, 여자애들 동아리 활동 열심히 안 하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뛰는데 왜 응원 안 해줘?” 이런 식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회장이랍시고 거기에 똑같이 동참해서 “그래, 지금 애들이 열심히 축구하고 있는데 와서 응원해줘야지.” 라고 말했어요. 남성의 목소리를 기본값으로 생각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여자인 저도 이에 너무 쉽게 동조해서 같은 일을 반복했던 거죠. 페미니즘을 배우고 나서는 그런 일들이 정말 후회가 됐어요. 나는 남성중심적 동아리 구조를 왜 변화시키지 못했을까? 이걸 왜 깨닫지도 못했을까? 하고요.

그런데 제가 굳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변화가 없지는 않았어요. 체육대회 때 여자 애들이 즐길 만한 프로그램이 없었다고 한 이야기가 전해져서, 그 다음 체육대회 때는 여성 구성원도 참여할 수 있는 경기로 프로그램을 짰어요. 물론 저 혼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니었어요. 동아리의 여자 회원들이 그런 의견을 전달했고, 다음 체육대회 기획팀에 저 말고도 여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 목소리가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거죠. 사실 변화는 리더 자리에 남자만 있을 때는 일어나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누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의견은 당연히 덜 중요하게 받아들이게 되잖아요. 그래서 목소리를 내는 자리에 다양한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회로: 제가 듣기로는 다른 동아리에서 여자 회장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면 “여자니까 그렇지” 라는 말을 주변에서 하기도 한다고 해요. 이런 것에 관해서 학교 분위기 같은 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희수 씨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희수: 저는 사실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고 엄청 열심히 했어요. 그러다 보니 동아리 회장을 할 때 진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죠. 물론 이건 제 성향이기도 해요. 리더라면 잘해야 된다는 압박감에 짓눌리는 편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것에 더해져서, 잘해야 되는 이유 중에 하나로 ‘나는 다른 남자 애들에게 뒤쳐지기 싫어’가 더해지는 거예요. 여고에서 반장할 때는 전혀 의식할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죠. 아, 그런 것도 있어요. 저도 예전에 들은 얘기인데, 제가 있던 동아리가 여자 비율이 되게 높다고 했잖아요. 우리 기수 때는 성비가 1:1도 더 넘어서 여자가 더 많았어요. 그러니까 처음에 어떤 선배가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동아리에 이렇게 여자애들이 많으면 동아리 작살난다’고. 근데 웃기게도, 어떨 때는 ‘동아리에 여자 비율이 높다’는 사실이 동아리의 자랑이 되기도 해요. 동아리 활동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단지 여자의 수가 관심 거리가 되는 거죠. ‘동아리에 남자가 많다’는 사실을 가지고는 아무도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잖아요?

회로: 맞아요. 확실히 그런 부분들이 있죠. 제가 나온 과학고등학교는 여자와 남자의 비율이 1:7 정도로 차이가 심했어요. 그런데 그 중에서 여중을 나온 친구가 했던 얘기 중에 하나가, 자기가 여중에 있을 때와는 달리 과고에 오고 나서는 “너는 여자니까 이러 이러한 걸 잘해.” 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너는 여자라서 필기를 잘해, 너는 여자라서 꼼꼼해.” 이런 말들이요. 혹시 희수 씨도 여자라는 이유로 자기가 자기로 호명 받지 못한 그런 경험들이 있나요?

희수: 음, 저는 그 편견에서는 조금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까 말했듯이 저는 누나라서 나이 권력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건 있어요. ‘누나’가 갖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엄마 대리’ 같은 느낌이랄까? 제게 그런 이미지를 바라고, 나 스스로도 털털한 누나 이미지를 가지려고 노력했어요. 저 이거 진짜 심해요. (웃음) 그런데 휴학하는 동안에는 알바하고 <페미회로> 활동하면서 ‘희수씨’라고 불리는 일이 많았는데, 그게 되게 좋았어요. 내가 ‘누나’가 아닌 자리에 있다는 게 묘하게 자유롭더라구요.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회로: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저도 공감이 많이 되네요. 그렇다면 혹시 남자가 대다수인 환경과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희수 씨가 직접 경험한 성차별적 혹은 여성혐오적인 발언이나 사건이 있나요?

희수: 그냥 너무 품평을 쉽게 하죠, 그게 얼굴이든 몸매든. 쟤는 얼굴이 어때, 쟤는 가슴이 어떻고 골반이 어때. 하는 말들이요. 최근에 누가 저를 그렇게 얘기하고 다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진짜로 기분이 나빴어요. 한마디 하자면 이 좁은 학교에선 그런 소리 다 당사자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으니까, 남의 얘기 그딴 식으로 안 하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 이야기 듣고 제가 무슨 60년대에 살고 있는 줄 알았다니까요.

저는 1학년 때 성추행을 당한 적도 있어요. 알고 지내던 남자애가 있었는데, 걔를 포함해서 친한 애들끼리 술을 먹으러 갔었어요. 학교에서 좀 멀리 떨어진 술집이었는데 되게 외진 곳에 있었어요. 거기서 술을 먹고 돌아오는데, 다 취해서 다른 애들은 먼저 가고 그 뒤를 둘이서 따라가다가 그 길에서 키스를 당했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페미니즘을 알진 않았지만, 그래도 성교육 시간에 ‘그런 일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배웠고 나름대로 내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제가 당연히 고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제가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까 신고할 수가 없고 신고해도 해결이 안될 것 같았어요. 그 때 친한 친구들 몇 명에게만 말을 했는데, 누구는 “너가 거기서 입은 안 벌렸어야 되는 거 아니냐.” 고 하고 다른 친구는 위로해준답시고  “네가 인기가 많아서 그런 거 아니냐.” 더라고요. 또, 학교가 좁으니까 같이 알던 사람들이 많잖아요. 제가 좀 괜찮아질 때 즈음에 누가 그 일을 가해자한테 듣고 와서는 “너 그런 일 당했다며?” 하고 물어보는 거예요. 아마 그 친구는 내 편에서 위로해주려고 그랬던 것 같긴 한데, 저는 오히려 이 일이 어디까지 퍼졌는지 상상하게 돼서 너무 끔찍했어요. 그래서 그 때는 사람들을 보면 ‘쟤는 알까? 쟤는 모를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나마 괜찮을 수 있었던 건 나보다 더 화를 내면서 “당연히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 새끼가 진짜 나쁜 놈이다” 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던 덕분인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면 아마 훨씬 더 힘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회로: 그렇군요. 희수씨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런 환경 속에서 공개적으로 페미니즘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힘든 점이 많을 것 같아요. 어떤 부분에서 가장 힘들고 한계를 느끼나요?

희수: 저는 페미니즘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학교에 있긴 했지만 휴학한 상태였어요. 그래서 내가 진짜 만나고 싶은 사람들만 만날 수 있었죠. 그런데 이제 복학을 해서 모르는 사람들을 새로 만나야 되는 상황이 되니까, 공개적으로 페미니즘 활동을 하는 게 약간 무서워지더라고요. 학교가 좁다 보니까 이 사람이 나를 얼마나 알고 있을지를 잘 모르겠어서요. ‘이 사람은 나를 어느 정도로 알까? 안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겁을 먹기도 해요. 그러다가도 문득 ‘아, 이건 너무 자의식 과잉인 것 같은데’ 싶기도 하죠. ‘뭘 날 알아, 당연히 모르겠지’ 하면서요. (웃음) 사실 이 인터뷰 하기 전에도 많이 무서웠어요. 곧 인터뷰 하니까 조용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대나무숲을 보다가 댓글을 달아버린 거예요. 막상 그 날은 파이팅 넘쳐서 아무렇지 않다가도, 며칠 지나고 나면 내가 왜 그랬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무섭고 미치는 거죠. (웃음) 웃으면서 얘기하긴 하지만 지난 주에 진짜 패닉 상태였어요.

회로: 그런데 그런 고민들이 너무 유별난 건 아닌 것 같아요. 당장 저도 페미니즘 티셔츠를 입고 다니다가 한 동안 그 옷을 못 입던 때가 있었어요. 그게 페미니스트인 다른 친구 얘기를 듣고 나서 그런 건데, 그 친구는 그 옷을 샀는데도 입고 다니다가 진짜 칼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직 한 번도 못 입어 봤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저도 그때서야 공포심이 들었어요. 그게 딱 강남역 사건 후에 대구에서 시위를 하는데 그 현장에 어떤 남자가 칼을 들고 나타났다는 기사가 뜨고 얼마 안 되었을 때거든요.

희수: 사실 <페미회로>도 그렇고 <오프코르셋>도 그렇고 신입생 분들이 많이 없잖아요. 저도 예전에는 <오프코르셋>이라는 단체가 있다는 걸 알았는데도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은 선뜻 못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공개적으로 페미니즘 활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저는 이미 3학년이고 학교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페미니즘 활동을 하다가 혹시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끝까지 같이 가 줄 내 사람들이 있겠지, 내가 메갈이어도 친구 해 줄 사람 몇 명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죠. (웃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진로를 결정하면서 대학원을 UNIST로 가지 않겠다는 확신이 섰으니까요.

사실 주변에서 건너건너 얘기가 많이 들려와요. 지나가다가 “언니 잘 보고 있어요,” “희수야 잘 보고 있어.” 하고 말하고, 저 처럼 오픈해서 말하는 게 대단하다고 해요. 그런데 사실 이건 멋있는 일이 아니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는 거예요. 저는 그 분들이 왜 공개적으로 페미니즘 활동을 하지 못 하는지 다 알고 너무 이해가 돼요. 당장 학교를 곧 떠날 사람인 저조차도 나서서 활동하기 좀 꺼려질 때가 많은데, 여기서 발 붙이고 석사, 박사 과정 할 사람들이 어떻게 저처럼 공개적으로 활동을 할 수가 있겠어요. 저보다는 훨씬 더 많은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일 수도 있어요. 아직은 학교나 연구실 내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친구에게도, 네가 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해요. 저를 너무 공개적으로 옹호했다가 친구가 나중에 되게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사실 이렇게 말하다가도 주위의 응원이 필요한 때가 있기도 해요. 인터뷰 하기 전에도 애들한테 톡 보내서 물어봤어요. ”나 메갈이어도 친구해줄 거지?” 하고. (웃음)

회로: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환경 속에서 희수씨가 페미니즘 활동을 하면서, 다른 곳보다 특히 이 곳, 이공계 대학 내에서 변했으면 하는 점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희수: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아요. ‘요즘 세상에 누가 그래?’라고 사람들이 말하는데요, 근데 진짜로 아직 있어요. 술자리에 여학생이 있어야 하고, 어디 놀러 가면 여자들이 음식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얘기, 저 아직도 들어요. 차별이 없는 게 아니라 그들의 눈에 차별이 보이지 않을 뿐인 거죠. 그럴수록 여성의 목소리가 앞으로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공계에는 아무래도 여성의 수가 적다 보니 혐오 발언들이 더 쉽게 자리를 잡는데, 그걸 막으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여성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봐요.

그리고 그렇게 여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곳에 다른 이슈를 가지고 와서 ‘중립충’처럼 “남성도 너무 힘들어요” 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지점에서 양비론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잖아요. 저도 그 사람들이 얘기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아요.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는 다른 방식으로 남성에게 짐을 지우니까요. 남성으로서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힘듦이 무엇인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여성이 짊어진 짐과 무게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남성이 힘들다고 토로하는 건, 그냥 여성의 목소리를 막는 거예요. “나도 이렇게 힘드니까 징징대지 말고 닥쳐!” 라고 말하는 것 밖에는 안되죠. 정말로 이 사회의 차별을 인지하고 그 차별에 대항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아줬으면 해요. 차별당하기 싫다면 함께 그러한 차별이 없어질 수 있도록 팔 걷고 나서야지, 왜 열심히 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회로: 그러면 이제부터는 희수 씨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좀 나눠볼까 해요. 페미니스트가 되고 난 후에 생긴 변화들이 있을 것 같은데,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한 뒤에 겪은 어려움이나 좋은 점이 있나요?

희수: 처음에 제가 페미니스트인 것을 오픈하게 된 건, 사실 저를 방어하려는 목적이었어요. 저는 상대방의 발언을 순발력 있게 잘 받아치지 못하는 편이라서, 그렇게 공개적으로 나를 드러내 놓으면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 앞에서 조금 조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회로: 그렇군요. 그런데 오히려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나면 이야기한답시고 일부러 논쟁거리들을 가지고 오지 않나요? 그럴 때는 가서 좀 찾아보고 오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죠.

희수: 그렇죠. 사실 SNS가 완전히 개인적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오히려 아는 사람들과 싸우면서 스트레스를 되게 많이 받아요. 차라리 모르거나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선 긋고 대화를 멈추면 될 텐데 그게 안되니까요. 내가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이해 받고 싶고, 내 편으로 만들고 싶어서 용을 쓰게 되더라고요. 그럴 때는 폰이 아니라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메모장에 한참을 쓰고 난 후 다시 댓글에 붙여 넣어요. 진짜 정성이죠? (웃음) 너무 화도 나고 손도 덜덜 떨리는데, 그걸 부여잡고 평온한 척 글을 쓰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모두 내 욕심이었구나, 나의 오만이었구나 생각해요. 이제는 ‘모두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어요.

회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온라인 페미니즘 활동에 대해서 얘기해 보고 싶네요. 저는 트위터에서 활동하는 편인데, 정말 매일매일 새로운 이슈들이 생겨나와요. 그래서 한 이슈에 대해서 입장을 정리하기도 전에 새로운 이슈들을 마주해야 해요. 모든 일들에 촉각을 곤두세우기가 쉽지 않죠. 희수 씨는 온라인에서 어떤 식으로 페미니즘 활동을 하는 편인가요?

희수: 저는 트위터는 안하고, 페이스북에서 몇몇 페미니즘 페이지를 구독하고 기사나 칼럼을 보면서 느릿느릿하게 그런 이슈들을 따라가고 있어요. 저는 이 정도 속도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인터넷의 모든 페미니즘 이슈를 알 필요도, 알 수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저는 제 페이스를 지키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학교 대나무숲도 팔로잉은 안했어요. 보면 화날까봐요. (웃음) 그래도 제 눈 앞에 보이는 이슈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편인 것 같아요. 최근에 썼던 글들이 그런데요, 대나무숲을 팔로잉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제가 학교 이슈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몇 번 들어갔다가 그런 글을 발견하고 댓글을 쓰게 됐어요. 제가 이번에 글을 쓰면서 중요하다고 느꼈던 게, 혼자서는 정말 못 싸운다는 거예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은근 겁이 많아요. 교내 사람들이나 <페미회로> 사람들이 그렇게 같이 얘기해주고 공감해주니까 싸울 수 있는 거지, 저 혼자서는 절대 그렇게 못해요.

회로: 희수 씨가 쓴 댓글을 보니까 통계자료들을 가져와서 반박하기도 하시던데, 그런 자료들을 평소에 모아두는 편인가요? 사실 자료가 중요한 게 아닌데, 몇 년 전부터 싸움이 팩트체크 식으로 변질되어버린 것 같아요. 상대편에서 근거를 가져오라고 막 요구하곤 하니까요. 답변하는 입장에서는 자주 답답하고요.

희수: 평소에 제가 따로 자료들을 모아두거나 그런 건 아니고, 이번에는 <페미회로> 아카이브에 그 자료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글을 딱 마주했을 때, 그냥 절대적인 ‘팩트’로 아무 말 못하게 막아버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팩트’를 요구하는 게 사실 달갑지는 않아요. 숫자 놀음에 치중하는 것 같아서요. 숫자 너머에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근데 또 그런 사람들에게 경험 얘기 해봤자 이해도 못하고…. 말하는 사람만 징징대는 사람 취급할 게 뻔하니까 그들이 원하는 자료를 갖고 온 거죠. 그런데 본인이 그런 부분들을 못 느낀다고, 그렇게 생각 안 한다고, 자료 갖고 오라고 하는 그런 순간에 사실 너무너무 화가 나요. 저는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 이미 취업한 친구들도 있어요. 취업한 친구들이 하나같이 다들 직장에서 성추행, 성폭력을 경험했다고 이야기하는데, 넷상에서는 그런 사례들이 지워지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라고 주변에 사례가 없는 게 아닐 텐데, 관심이 없고 들을 생각이 없으니 모르는 거죠.

회로: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렇다면 혹시 페미니스트가 되기 전과 후를 비교해 봤을 때, 희수 씨의 인간관계에도 어떠한 변화가 생겼나요? 평소에 하는 대화주제에 대한 변화라든가 하는 것들이요.

희수: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눈치를 슬슬 봐가면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많이 꺼내놓는 편인 것 같아요. SNS에서는 더 대놓고 하고요. 아예 관심이 없거나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야 절 차단하거나 했겠지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제가 이렇게 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무섭더라도 이 인터뷰를 실명으로 진행한 이유이기도 해요. 아는 사람 이야기라면 그래도 한 번 더 보게 되고 듣게 될 거라고 기대해서요.

새로 만난 사람들에게는 양가적인 감정이 드는데, 나를 드러내고 싶으면서도 드러내는 게 두렵기도 해요. 제 노트북에 페미니즘과 관련된 문구들이 되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데요, 나 이런 사람이라고 노트북을 드러내 보이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보이고 싶지 않은 거예요. 도서관에서 노트북을 두고 잠깐 자리를 비울 때도 고민을 해요. 사실 보여주려고 일부러 여기다가 붙인 거잖아요. 근데 내가 없을 때 노트북이 부서져 있을까봐 슬그머니 가려 놓곤 해요. (웃음)

페미니스트들은 정말 편하다고 느껴요. 알고 지낸 기간과는 크게 상관 없이요. 제가 만난 페미들은 서로의 존재를 되게 소중하게 여기고, 서로가 어떤 지점에서 힘들고 고생하는지 알아서 공감을 많이 해줘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려고 노력하는 게 보여서, 페미니즘이 아닌 다른 주제의 이야기라도 아주 편안한 분위기에서 할 수 있어요. 사실 페미니스트들이 좋아서 페미니즘이 더 좋은 것도 있어요.

회로: 그럼, 어떻게 보면 연애도 인간관계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많은 분들이 우리 나이대의 페미니스트가 하는 연애에 대해 궁금해하더라고요. 주변에서 페미니스트로의 정체화 이후 기존 연애에 트러블이 생기거나 연애를 못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봤는데, 희수 씨는 어떤가요?

희수: 저희도 당연히 처음에는 많이 싸웠어요.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제가 <페미회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부터 인 것 같아요. 초반에는 그냥 끄덕끄덕하고 지지해줬는데, 제가 젠더서밋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하는 깊이가 달라지니까 상대방이 불안해하는 거예요. 페미니즘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우리 관계에 페미니즘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겠다고요. 그 이후에 몇 달을 계속 울고 싸웠어요. 사실 그 땐, 제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마음이 급해서 제 안에 있던 고민들을 배려 없이 와르르 쏟아 놓다 보니까 상대방이 많이 힘들어 했어요. 많이 미안하고 고마운 부분이에요. 근데 그 과정에서 우리 사이에 놓였던 많은 장벽들을 허물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생각보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잘 몰랐다는 것도 알게 됐죠.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계속 나오는데, 그런 지점들에서 다 털어놓고 얘기하려고 하니까 가끔은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게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저희가 그때 결혼이라든지, 스킨십이라든지 되게 많은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예를 들어, 저는 페미니즘을 배우기 전부터 결혼에 대해서 꽤 회의적이었는데요. 우리 사회에서는 연인 관계의 ‘완성’을 결혼이라고 두니까, 좋은 만남을 갖고 있는 와중에 그런 얘기가 언뜻언뜻 나오잖아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저는 이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서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또 완전히 동의 하지도 못하고.. 대화가 이상하게 끝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그 쪽으로는 대화를 아예 피하게 되고, 우리 사이에 그 주제는 ‘건드리고 싶지 않은 부분’으로 남게 되는 거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몇 개 생기니까 대화가 공백이 생기고, 그것 자체가 큰 고민이 되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고민들을 하나씩 털어놓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더 단단해진 것 같아요. 당연히 쉬운 과정은 절대 아니었어요. 저도 저지만 상대방도 책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 하면서 고민을 진짜 많이 해줬고, 서로가 그렇게 노력했기 때문에 그게 결실을 맺은 것 같아요. 우리가 건너 왔던 시간은 분명히 힘들었고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의 평등한 관계 덕분에 그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행복해요. 앞으로도 이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관계를 이어 나가고 싶어요.

사실 저는 저희의 이런 경험이 일반화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처럼 애인과 페미니즘 이슈를 꼭 나눠야만 하는 것도 아니죠. 하지만 상대방이 나의 삶과 나의 가치관을, 단지 나의 성별 때문에 멋대로 재단하려고 한다면 그건 절대 좋은 연애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건 누구 한 명이 노력해서 될 문제는 아니고,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것 같아요.


회로:
 사적인 부분이라 곤란하셨을 텐데 진솔하게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미니즘을 하면서 생긴 또 다른 변화 중에 하나가 진로라고 들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희수: 사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바뀐 건 아니고, 처음부터 과학사나 과학철학 쪽으로도 관심이 있었어요. 저는 처음부터 과학을 공부하겠다고 생각했던 게 아니라, 원래는 기자나 인문학자 같은 문과 쪽의 진로를 생각하다가 진화론의 매력에 빠져서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그런지 과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과학의 객관성이나 합리성, 그리고 그것을 공부하는 과학인 자체에게 동경심이 있었어요. 진화론을 공부하겠다고 생각했을 때도, 저는 과학적 사실도 사실이지만 진화론이라는 지식을 둘러싼 갈등 구조에 더 관심이 많았고요.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이과생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웃음) 그런데 휴학 전후로 사회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어요.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과학 지식도 당시 사회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변수 중의 하나로 사회의 젠더관이 있는 거죠. <페미회로>에서 걸스로봇과 함께 한 젠더서밋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배우게 된 것들이 되게 많아요. 학회 자체는 2박 3일의 이벤트였지만, 끝나고 글을 써서 결과를 내놓아야 했잖아요. 그래서 함께 한 사람들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또 혼자서 공부하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제가 썼던 글은 과학사에서 어떻게 여성을 배제시켜왔는지, 남성 중심적인 과학 사회가 과학지식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에 대해서였어요.

요즘에는 과학교육에 관심이 있어요. 저는 과학 지식을 절대적인 불변의 것으로 배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과학 지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자리잡아 왔는지를 과학사의 형태로 배우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여기에 더해서 과학 교과서의 젠더 편향성에 대해서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고요.

회로: 희수 씨는 요즘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가지고 있는 고민은 없나요?

희수: 고민이라기 보다는, 그냥 ‘학교에 페미니즘을 이야기 하는 목소리가 너무 없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요즘에 대나무숲 댓글들을 보니까, 제가 몰랐을 뿐이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꽤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분들을 좀 더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들어서 느끼는 건데, 연대하고 서로 응원해주는 게 정말 중요하더라고요. 응원하고 싶고, 응원받고 싶고 그래요.

회로: 그럼 희수씨에게 페미니즘은 어떤 의미인가요? 혹은 희수씨가 바라는 페미니즘은 어떤 것인가요?

희수: 저는 페미니즘을 만나고 나서 나 스스로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해요. 돌봄 노동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고, 외모 코르셋에서도 조금씩 벗어나고 있어요. 평소에 쓰는 말들을 다시 되짚어 보게 되고, 스스로의 섹슈얼리티에 관해서도 고민하게 되고요. 특히 제 경험들, 묻어두었던 고민들을 다시 꺼내서 재의미화 하는 과정을 최근에 되게 많이 하고 있는 거 같아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훨씬 조심스럽게 다가가게 돼요. 후배들을 만났을 때도 ‘무의식적으로 내가 무슨 권력을 사용하고 있지 않나, 내가 이 사람을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나’하고 되게 많이 성찰해 보게 되죠. 티가 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웃음)

사람들이 언뜻 보기에는 제가 그냥 다른 사람들과 싸우기만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나 자신과 제일 많이 싸워요. 그런 고민들이 내 안에서 새롭게 자리잡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고, 내 안에서 뛰어넘어야 하는 것들이 많으니까요. 물론 좋지만은 않아요. 페미니즘을 만나지 않았으면 이런 고민들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고민 없이 제가 감히 누구를 설득할 수 있겠어요? 바꿔 말하면, 제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 힘들긴 해도 스스로 훨씬 나아지고 자유로워지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싶은 거예요.

회로: 희수 씨와 얘기하다 보니까 희수 씨가 페미니즘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 그러니까 목표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 듣고 싶어요.

희수: 목표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주변이 지금보다 더 괜찮아졌으면 해요. 저는 페미니즘을 배우고 페미니스트가 되고 나서 되게 좋거든요. 애인과도 훨씬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과도 더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이런 변화를 느껴봤으면 해요. 음, 사실 진짜 빻은 사람들, 그러니까 노선이 다른 사람들은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변화로 그 사람들의 혐오 발언들을 조금이라도 몰아내고 싶어요. 포스텍에서 #포스텍페미니즘 운동 이후에, 학교 내에서 혐오 발언이 훨씬 줄어든 것 같다고 <페미회로> 회원 분이 말씀해 주셨거든요. 아직 UNIST에는 그런 경각심이 좀 부족한 것 같아요. 제가 하는 이런 활동들이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서, 그런 분위기가 차차 형성되어 갔으면 좋겠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있을 곳이니까요.

회로: 희수 씨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에서는 실천적인 부분이 많이 느껴지네요. 그런데 SNS와 같이 온라인 상에서 진행되는 논의 중에는 책을 읽지 않으면, 그러니까 관련 지식 없이는 대화하기 힘든 부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페미니즘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고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희수: 저는 대단한 지식을 쌓아야만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도 칼럼처럼 짧은 글을 읽는 걸로 시작을 했어요. 지식이 필요 없다는 건 아니지만, 지식이 있어야만 말할 수 있다는 부담감을 갖지 않았으면 해요. 어떻게 보면 여성의 삶 자체가 페미니즘인데,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조금씩 바꿔가는 것부터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요? 저는 SNS에서 회자되는 이슈들에 대해 제가 꼭 따라가야 된다는 부담감은 없어요. 웹상의 논의를 따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에게는 당장 내가 발 딛고 서있는 곳의 문제가 훨씬 중요하거든요. 선택의 문제인 것 같아요. 사실 지금 우리가 학교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들, 현실에서 싸워야 하는 문제들은 이미 학계에서 논란이 끝난 것들이 대부분이잖아요. 물론 그런 이슈들을 공부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저는 제 생활에서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두려고 해요. 그리고 저는 제가 페미니즘을 만나고 나서 자유로워진 부분이 많고 변화된 제가 좋기 때문에 이 운동을 계속 하는 거예요. 내가 좋으려고 하는 건데, 나를 파괴하면서 운동을 하면 지속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저의 운동을 너무 가볍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저는 저와 제 주변 사람들이 조금 더 나은 곳에서 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선에서 할 수 있는 걸 해 나가려고 해요.

회로: 혹시 10년 후의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희수: 저는 실험 연구를 하지는 않겠다고 결정을 내렸잖아요. 그렇게 진로를 결정하고 휴학하는 동안 진로 고민을 하면서, 좀 여유를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실험 연구를 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아무래도 실험실이라는 공간이 나에게 꼭 있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학사-석사-박사 이 경로를 이탈하면 공부를 할 수 없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엄청 조급했어요. 그런데 이제 내가 할 연구는 어디서든 할 수 있어요. 대학원을 당장 붙지 못하더라도, 뭐 돈을 벌기 위해서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고 아예 엉뚱하게 서점을 열거나 카페를 할 수도 있죠. 그러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도 있는 거고요. 10년 후에 제가 어디에 있든지 조금씩이라도 한 발짝 나아가며 공부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아요.

회로: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의미로, 10년 후에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본다면?

희수: 10년 후에는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으면 해요. 내가 굳이 그렇게 스스로를 표명하지 않더라도 나 자체로 인정 받을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습니다.

회로: 이건 현재 PM인 미량님의 질문인데, 페미회로의 다음 PM을 맡을 의향이 있나요?

희수: (크게 웃음) 아니, 근데 저는 페미니즘 단체가 정말 페미회로가 처음이라서, 지금 하는 활동이 처음이니까, 다른 경험이 없어서 제가 미숙할 거 같아요. 미량님은 정말 잘 하고 있어요. 근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다른 페미니즘 단체 활동을 통해 실패의 경험을 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 경험을 가지고 페미회로의 일들을 잘 조율하고 있고요. 저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 좀 두려운데요.

회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희수: 주변에서 조용히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응원을 하고 싶어요. 꼭 활동을 해야 페미니스트인 게 아니고, 자기 주변 사회의 틀을 조금씩 깨고 자신에게 놓여진 틀을 깨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부담 가질 필요도 없고요. 내가 뭐라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 가지지 말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요. (웃음) 이건 그냥 인용인데 <걸스로봇> 세리님이 한 이야기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이공계에는 여성들의 이야기 자체가 많지 않으니까, 이공계 여성이 자신의 커리어를 잘 쌓고 챙겨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페미니즘을 실현하고 있는 거라고요. 이제는 제가 일반적인 과학도의 길을 벗어나긴 했지만, 저도 여성 과학기술인으로서 멋진 길을 걷고 싶고 주변 친구들도 많이 응원하고 싶습니다.

 

활동의 ‘지속가능성’은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고민하는 지점 중 하나이며, 많은 이들이 이러한 고민과 함께 각자의 자리에서 외롭게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희수 씨와의 인터뷰는 우리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페미니즘은 어려운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의 삶 자체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선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천천히 주위를 지금보다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꾸준한 활동을 해 나갈 수 있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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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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