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tists∩Feminists 페미회로 인터뷰 프로젝트 XII: <여혐민국>의 테크페미를 응원합니다, 페페미들의 대모 ‘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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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겸 ‘페페미 대모’ 양파

지난 3월 12일 대전에서, 국내 5개 지역거점 과학기술중심대학(DGIST, GIST, KAIST, POSTECH, UNIST)의 페미니스트 연합모임 <페미회로(영문명 FemiCircuit)>가 공식 출범했다. 페미회로는 이공계 내 젠더 불평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지속 가능한 페미니즘을 실천하려는 모임이다.
(페미회로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femicircuit)

페미회로에서는 2017년 연중 프로젝트로 이공계 내 여성 과학자, 연구원들과 우리 주변의 페미니스트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이름을 얻었거나 얻지 않았거나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연구하고 고민하며 실천하는 이공계 여성 연구자들을 통해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보다 조금 뒤의 미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MS)에서 근무하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이자, 최근 페미니즘 도서 <여혐민국>을 내놓은 ‘페페미(페이스북 페미니스트)계의 대모’ 양파씨를 만났다.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양파는 미국 시애틀 출장 중 새벽 시간을 털어 스카이프 화상 인터뷰에 응했다. 한국 시간으로는 늦은 밤이었다. IT 개발자로서 이공계 여성은 어떤 방식으로 커리어 패스를 진화시킬 수 있는지, 그가 본 한국 안팎의 페미니즘은 어떤 모습인지를 여기 함께 나눈다.

페미회로 인터뷰어는 박미란, 이윤석으로, 회로라고 표기했고 인터뷰이 양파는 양파로 표기했다. 검수는 김한솔, 백부경, 성기봉, 지은경 (이상 가나다 순)의 검수팀이, 최종편집과 발행은 <걸스로봇>이 담당했다.

 

회로: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양파: 두 아이 엄마이자 IT 개발 18년차인 직장인입니다. IT 내에서도 여러 가지 분야를 했어요. 개발로 시작해서 QA 품질관리를 했고, 영국에 와서는 데이터 시스템 테스팅(Data QA)을 했어요. MS로 오면서 다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역할이 바뀌었는데, 데이터 쪽 일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직함은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됐지요.

“개발자로의 진입”

회로: IT 전공을 선택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양파: 미국 대학에 떨어지고 남아공 대학 1학년에 입학했을 땐 “나는 이런 곳에서 썩을 사람이 아니다.”는 자의식이 넘쳤어요. 그러던 중 여름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광고를 뒤지다가 데이터 엔트리(Data entry)라고, 손으로 쓴 폼을 타이핑해 전산화하는 일을 봤지요. 일종의 타이피스트에게 당시 돈으로 무려 3000랜드(약 40만원)를 주겠다는 거에요. 성공하려면 끈질기게 어필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일 전화를 했어요. 전화를 받는 사람이 제가 불쌍해 보였는지, 동생이 다니는 회사에서 프로그래머를 찾는다고 알려줬어요. 데이터 엔트리랑 비슷한 일이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그저 ‘나는 타이핑이 빠르니까 가보자.’ 하는 정도였죠.

제 클라이언트는 영국 회계사였는데, 남아공까지 와서 ‘픽(Pick)’이라는 언어를 쓰는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재고관리를 쉽게 할 수 있는 언어였죠. 본인이 정식으로 프로그래밍을 안 배운 상태라, 정식으로 전산을 전공한 프로그래머를 고용하면 오히려 휘둘리게 될까 걱정을 했나 보더라고요. 갓 고등학교 졸업한 어린 친구들을 뽑아서, 어떻게 보면 세뇌를 시키는 거죠, 직접 교육시킨 프로그래머들을 고객사로 보내는 거였습니다. 포스(Point of Sale) 시스템, 재고관리 시스템을 커스터마이징해 솔루션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제가 들어갔을 때는, 구식 언어인 픽 시스템을 좀 더 대중적인 언어로 바꾸면 어떨까 생각하던 중이었나 봐요. 마침 그 시절에 뜨기 시작한 언어인 파이썬(Python)으로 바꾸는 작업이었죠. 저는 당시만 해도 아는 것이 없으니, 아침마다 사장이 내리는 오더를 받아 하루 종일 코딩을 했어요. 예를 들어 이런 식이었어요. “어떤 기능을 구현해야 하는데, 찾아봤더니 파이썬에 이런 라이브러리가 있더라. 한 번 해 봐.” 이게 시작이었죠.

회로: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IT 계열 전공(직업 혹은 이공계)을 선택하려고 하면 부정적인 이야기를 쉽게 듣게 됩니다. 저희 KAIST만 해도 여학생 비율이 20%(*학부 18%, 대학원 22%, 합산 19%. 대학알리미 2016 통계)로 상당히 낮습니다. 양파님이 살았던 곳은 어땠나요?

양파: 제가 이사를 많이 다녔잖아요. 나라마다 상황이 다른 것도 있지만, 사람이 느끼는 감정도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먼저 느끼고 그걸 정당화하는 것 같아요. 남녀에 대한 인식도 그래요. 그냥 갖다 붙이는 거거든요.

예를 들어 러시아에서는 의사가 여성적인 직업이라고 하더라고요. 사람들을 돌보는 거니까 당연히 여자가 해야지 왜 남자가 하냐고 그런다네요. 신랑이 골드만삭스에서 일 할 시절에 들은 얘기인데, 구인해보면 여자 프로그래머 중 상당수가 루마니아 출신이었대요. 저희도 이번 신입이 22살 루마니아 출신 여성이에요. 그 신입에게 물어보니 “프로그래밍은 여성적인 직업이기도 하고, 이 직업에 관해서는 성별의 범위가 없는 것 같다”고 했어요. <히든피겨스>의 시절인 1960년대에는 남자들은 밖에 나가서 일하고, 수학 계산, 프로그래밍은 여자들이 했지만 요즘에는 안 그렇잖아요.

남아공에서는 여학교를 다녔어요. 동성학교에서는 제가 여자라는 걸 잊어버렸어요. 여대 분들도 이런 이야기 많이 하거든요, “여대에서는 자기가 여자라는 걸 잊어버리고 사람으로 살 수 있었는데 사회 나가니까 차이를 많이 느낀다.” 라고요. 제가 다닌 학교에서는 여학생들도 스포츠를 많이 하고 독일어도 다 하는데, 혼성 학교에서는 남자들은 독일어를 더 많이 택하고 여자들은 프랑스어를 더 많이 택하죠. 근데 프랑스에 여자만 사는 것도 아니고 언어 차체에 성별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또 나라마다 편견이 크겠지만, 그룹 안에서의 차이도 큰 것 같아요. 남아공에서는 IT 분야에 여성이 적긴 했지만 가사와 육아와 같은 살림 노동이 흑인 여성에게 옮겨짐으로써 오히려 백인 사회 내에서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덜했어요. 좀 씁쓸하죠. 다른 그룹의 이들을 착취함으로서 이룬 성평등이니까요. 수학과 IT 분야에 여성 비율이 높은 건 아니었지만 남성들만 한다는 편견은 없었어요. 예를 들어 영어를 전공한 여자에게 왜 여자가 이걸 하냐고 안 묻잖아요.

 

“결혼, 육아와 직장”

회로: 결혼 육아와 직장, 저에게는 너무 어려운 주제인 것 같아요. 아직 경험해보지 않아서 그런지 걱정만 많은 것 같아요.

양파:  제가 최근에 결혼/육아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만 쓴 것 같은데, 제 삶에서 제일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남편이고, 살면서 제일 잘했다고 생각한 건 결혼, 같이 일하는 친구들 중에서 “정말 인간적으로 너무 잘나고 너무 존경스러워서 내 자신이 싫어진다. 정말 친해지기 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자이자 게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동료들도 숫자로만 보면 남자들이 많아요. 약간 걱정이 되는 게 저는 페미니즘에서 ‘남자들은 다 나빠, 결혼하면 다 망하는 거야’ 라는 방향으로 가는 게 좋진 않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회로: 출산 후 육아와 병행하면서 커리어를 쌓는 것이 가능하셨나요? 출산휴가는 자연스러운가요? 양파님이 경험하신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양파: 서유럽쪽은 출산 휴가가 자연스러워요. 미국의 경우 정부가 보장하는 출산휴가 기간이 서유럽에 비해 훨씬 짧지만 괜찮은 회사들은 유급 4~5개월로 주는 경우가 많죠.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저소득층으로 내려갈수록 출산휴가가 더 짧아요. 제 주위나 신랑 주위를 보면 어느 정도 수준의 직장에서는 출산휴가가 보장되고, 육아랑 병행하는 것이 한국보다는 훨씬 쉬워요. 아빠도 출산휴가로 기본 2주를 주는데, 남자가 “아이가 아파서 집에 가야 한다.” 라는 경우도 자연스럽고, 아빠들도 엄마랑 같이 탄력근무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IT 업계에서는 엄마가 아침에 일찍 나가고 오후에 일찍 끝나서 아이들 픽업하면, 아빠는 아이들을 아침에 데려다 주고 저녁에 좀 더 늦게 일하는 가정이 많아요.

근데 이렇게 말하면서도 죄책감 느끼는 건, 사무직 혹은 어느 정도 수준의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육아를 병행하면서 커리어를 쌓는 게 가능한데, “Zero-hour contract” 같은 비정규직, 일주일에 어느 정도 일하는지 정해져있지 않은 기간제 노동자들의 경우는 더 힘들어요. 그러니까 ‘서유럽과 미국은 훨씬 보장이 잘 되어 있다’와 같은 인식 역시 그 사람의 배경이나 특권을 나타내는 발언일 수 있겠죠.

회로: 한국의 경우 아직까진 여성 남성 다 출산휴가 쓰는 것이 눈치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은 아직 경력단절에 대한 제도가 많이 없는 것 같아요. 외국에는 경력단절이 된 여성을 돕는 제도가 있나요?

양파: 오히려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서양권은 이미 페미니즘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서, 여자는 커리어를 선택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제한을 두면 안 되지만, 반대로 집에서 전업주부로 아이를 본다는 선택 역시 존중한다는 분위기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개인의 선택이고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 할 것이 아니라는 거죠. 집에서 아이를 보겠다고 선택하는 것이 “네 선택이니까 네가 책임져”라는 건데, 모든 선택이 언제나 자기가 원해서 한 것은 아니거든요. 출산휴가가 보장이 안됐을 수도 있고, 수입이 엄청 낮은데 탁아비용이 너무 높아서 어쩔 수 없이 집에 있을 수도 있고, 남편이 싫어하는 경우도 있죠. 어느 정도 이상의 교육과 수입이 되는 여성이 많고 그런 여성들이 출산휴가나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보니 병행하지 않는 것은 정말 자기 선택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강한 것 같아요. 그래서 경력단절 여성을 돕는 제도를 특별히 구성한다고 할 때 국민적 동의를 얻는 것은 오히려 해외에서 더 어려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하죠. 커리어와 육아를 병행하는 게 어느 정도 할 만하니까 오히려 더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지만, 경력단절이 자신의 선택이 아닌 경우가 많잖아요. 경제적인 이유든지, 환경적인 이유든지. 그것들이 고려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어요.

회로: 한국도 그걸 개인적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양파: 많죠. 하지만 차이점이라면, 한국에서는 일하고 싶은 여성을 강압적으로 그만둘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누가 봐도 회사가 잘못한 케이스가 많잖아요. 어떻게 보면 제가 페이스북에 한국어로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한국에는 정말 분명한 악행이 존재해요. 사회에서 대놓고 차별을 하고 회사에서 정말 자르잖아요.

회로: 한국에서는 육아, 가사노동, 그리고 커리어 모두를 완벽하게 하는 ‘슈퍼우먼 엄마’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무게가 많습니다. 또한 한국에서 여성이 가정과 일을 둘 다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외국에서도 이런 현상을 이야기하는 문장이라거나 단어가 있나요?

양파: ‘You can have it all!’ 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있어요. 원래 의미는 “커리어와 가정을 다 가질 수 있다” 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커리어를 가지고 가정도 가지는 게 얼마나 너는 행운이냐, 그러니까 둘 다 열심히 해라.” 혹은 “둘 다 할 수 있는데 왜 하나만 택했냐? 왜 너는 커리어 포기했냐? 왜 집은 개판이야?” 이런 식으로 바뀌었어요.

60억 인구가 언어는 다르고 DNA는 다를지라도 아직까지는 어디를 가든 여혐에 있어서는 대동단결인 것 같아요. 최근에 <사피엔스> 책을 읽었는데, 전세계 모든 사회가 각각 밥 먹는 방법, 인사, 예절, 장례 문화가 다 다르지만 그 모든 문화를 통일해주는 게 신을 믿는 것과 여혐이에요.

회로: 여전히 한국 남성에게 육아와 가사노동은 아내를 “돕는” 일인 것 같아요. 양파님께서는 양파님의 남편 분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하는데, “한국 기준”으로는 페미니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두 분 모두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데, 육아와 가정의 일을 어떻게 나누어 하나요?

양파: 분배하고 나눈다기 보다는 저희는 룸메이트 2명이서 같이 산다는 느낌이에요. 서로 눈치를 보는 편이고요. 서로 빚지는 걸 싫어해요. 처음부터 서로 나누자, 누가 더 많이 하자, 이런 게 없었어요. 거의 본능적으로 내가 얼만큼 한다는 걸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고, 다른 사람이 얼마나 하는지 주시하고 있어요. 아이가 깰 때도, 거의 정말 똑같이 기억해요. 어제는 신랑이 했으니까 오늘은 내가 하고. 그 다음에는 제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신랑이 해요. 제가 두 번 연속으로 하면 자기가 나쁜 사람이 되잖아요.

회로: 결혼이란 정신적으로 성숙한 어른끼리 같이 사는 건데, 제가 양파님이 말씀하신 생활 모습을 어렴풋하게 그리고 있었어요. 사실 제 주변에는 그런 모습이 하나도 당연하지 않아서, 양파님 케이스가 굉장히 특이하고 남편분이 페미니스트인 것처럼 보였어요.

양파: 친구랑 같이 하우스쉐어 한다고 할 때 당연한 것 아닌가요? 남녀 사이에서는 그 관계가 많이 달라지는 걸 많이 봤는데, 저희는 성격이 둘 다 비슷해서 가능한 것 같아요. 남편이 페미니스트라서 집안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같이 사는데 서로 눈치 봐가면서 조율해가는 게 당연해서 그런 거에요.

 

“여성 개발자”

회로: 양파님은 외국에서 IT 분야 커리어를 쌓아가고 계신데요, 외국 여성 분들이 커리어를 쌓아가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의 경력단절이 큰 걸림돌이죠. 그리고 여성들은 경력이 단절된 다음에는 결국 노동조건이 열악한 비정규직으로 취직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 되게 많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먼저 외국에서는 어떤 지가 궁금하고, 두 번째로는 이공계의 맥락에서만 생기는 특수한 상황이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커리어패스를 밟아가는 과정이 상당히 다른데 외국도 그런가요?

양파: 이공계와 의료계에서 여성들의 경력단절이 가장 덜하고, 법률, 금융쪽처럼 근무강도가 높은 곳에서 경력단절 현상이 가장 심해요. 직업별로 차이가 큰 것 같아요. 하지만 아이가 있는 경우 근무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데, 한국의 “경단(경력단절)”처럼 <마미 트랙(Mommy track)>이라는 것이 있어요. 

한국 회사에서 ‘임원’을 꿈꾸듯이 법률계에서는 ‘파트너’를 목표로 삼고, 학계에서는 정교수가 되는 ‘테뉴어’를 목표로 삼죠. 그래서 그걸 목표로 일하는 사람들보고 “파트너 트랙”, “테뉴어 트랙”이라고 말 해요. 그에 비해서 “마미 트랙”은 결혼하고 자녀가 있는 여성들의 커리어 패스를 뜻합니다. 아이를 낳은 뒤 안정적이면서 승진의 기회는 별로 없는 자리로 가는 거죠. 자발적으로 택하는 경우도 있긴 해요. 의사는 전문의를 힘들게 하는 것보다 오전 근무만 하는 식으로 바꾸죠. 회사에서 대놓고 차별하지는 않지만 마미 트랙은 확실히 있어요. 회사에선 압력을 줬다고 하더라도, 앞에선 ‘배려’ 혹은 ‘개인의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이런 사회 현상은 확실하게 있지만, 한국보다 제도적인 차별은 훨씬 덜해요.

회로: 그런데 이게 IT 분야에서는 조금 덜한 건가요?

양파: 훨씬 덜해요. 재택근무가 좀 더 쉽고, 출장도 그렇게 많지 않고. 대도시 내에 직장이 많기 때문에 어린이 집 같은 인프라도 많고요. IT 분야에서는 마미 트랙이란 얘기를 잘 못 들어봤고, 법조계와 언론, 금융 회계에서 많이 들었어요.

앤 마리 슬로터(Anne-Marie Slaughter)라고 유명한 미국 정치인이 있었어요. 원래 아이비리그 교수였는데 교수직을 놓고 워싱턴 DC 정부 고위직에서 일하다 다시 돌아왔어요. 그 후에 쓴 글이 <당신은 다 가질 수 없어(You can’t have it all).> [1]: 관련기사 [2]: 관련영상 였어요. 교수인 남편이 상대적으로 시간 활용이 자유로워 아이를 돌봤는데, 아이가 십대일 때 문제를 일으키면서 엄마가 돌아올 수밖에 없었죠. 워싱턴 정가의 분위기는 가혹해요. 일요일 저녁에 들어가서 금요일 저녁에 나온대요. 거의 24시간 상시 대기 상태고, 언제 미팅이 잡힐지 몰라요. 거기에 있는 고위직 남자들은 다 부인이 있어서 챙겨주죠. 앤 마리 슬로터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말, 가정과 일을 양립할 수 있다는 주장은 허상이다. 나도 힘들었다. 남편이 많이 도와줘도 가능하지 않았다.”고 고백했어요.

회로: 남자들이 많은 직군에서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있다거나, 성과를 낮게 보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는데, 양파님은 혹시 외국에서 그런 것을 겪으셨나요?

양파: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저는 특수 상황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험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요. 한 번은 해커톤에 남편이랑 같이 갔는데 주최자 아저씨가 저보고 물 한잔 가져달라고 하길래 갖다 줬어요. 화가 나서 일박 이일 밤새우고 발표해서 우승을 해버렸는데, 그 주최자 아저씨로부터 상을 받았어요. 좀 짜증은 났지만 따지긴 뭐했던 것이, 제가 여자라서 부탁한 건지, 그냥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 물 한잔 떠달라고 한 건지 확신할 수가 없잖아요.

같이 일하는 동료가 40대 중반 남아공 남성분인데, 둘이 들어가면 보통은 그 분이 보스라고 생각해요. 근데 이걸 가지고 차별한다는 말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제가 여성이라서 보이는 반응이 다르고, 그게 더 유용할 때도 있어요. 말하기 힘든 것, 까다로운 것은 동료가 얘기하는 것보다 제가 이야기하면 똑같은 말을 해도 조곤조곤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더라고요. 공격적인 분위기에선 제가 이야기하면 분위기가 좀 더 유해지죠.

여성에 대한 편견이라는 게 나이가 어릴수록 더 심해요. 20대 초 중반 남자들이 여혐 제일 심하고, 따지는 거 심한데, 나이가 들며 직책이 높아질수록 그런 건 잘 없어요. 같이 일하는 친구들 보면 여성에 대한 편견이 심한 경우가 많은데도, 이상하게 그건 자기 부인이나 사적인 공간의 여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고, 동료인 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저는 외국인이고, 직장인이고. 얘네도 해외 취업이잖아요. ‘아 여기 여자는 그렇구나’ 라고 생각하는 거 같기도 해요.

회로: 뛰어난 성취를 이뤘는데 여성이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실적을 뺏기는 부당한 일들이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죠. 해외라고 그런 상황이 다르진 않았는데요, 최근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양파: 극과 극으로 갈리는 거 같아요. 성차별이 심하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인지하는 글로벌 기업 내에서는 여성들을 많이 격려하고 밀어줘요. IT 쪽이 일반적인 기업보다 조금 더 그런 경향이 있어요. 구글, 아마존에서 뭔가를 할 때, 여성 혹은 비백인 멤버가 있으면 사진 찍을 때 가운데에 세우거나, 그 멤버가 한 기여를 꼭 언급하는 식으로, 좀 과하거나 억지스럽게 차별이 없음을 광고하려는 느낌이 분명히 있어요. 한편 정반대쪽에서는 예전처럼 여성들이 한 일이 묻히기도 하고요.

한국에는 대놓고 ‘여자가 나대면 뭐하냐?’ ‘여자가 회장하면 보기 안 좋다.’ 이런 식의 성차별적인 발언이 좀 더 잦은 것 같은데, 해외에서 그런 정도의 발언을 하면 대기업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죠. 하지만, 본능적인 것이든 사회화의 결과든 간에 여성들이 덜 공격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남성들에게 좀 밀리는 현상은 있어요. 더 강경하게 나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남자라서 여성이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 놓이기도 하고요. 

제가 일하고 있는 분야에서는 제가 관리자를 하고 싶다고 바란다거나 혹은 좀 더 야망이 있다면 엄청 밀어주려고 할 거에요. 왜냐면 ‘아 빅데이터 팀에는 여자 팀장이 있다. 우리가 이런 회사다. 우리가 이렇게 참 많이 배려를 한다.’ 그렇게 어필하고 싶어하는 문화가 있거든요. 근데 저는 죄책감을 느껴요. 전 세계 여성들이 편견으로 고생하는데, 제 회사가 ‘그래, 우린 여자에게 안 그런다는 것을 보여주자’라고 보이기 위한 제도를 만든 거고, 그 결과로 제가 좀 더 특혜를 받는 셈이니까요. 고생은 누가 하는데, 특혜는 누가 받고. 이런 자각을 갖고 있어요.

회로: 한국의 IT 회사랑, 외국의 IT 회사랑 사내 문화가 좀 다를 것 같아요. 저는 한국 IT 회사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데요, 노골적으로 성추행을 하지는 않지만 ‘김여사’ 같은 수준의 여성혐오적인 농담들은 자주 나오는 편이에요. 문제제기가 전혀 안되는 문화기도 하고요. 이게 왜 문젠지를 모르는 상황인 것 같아요. 외국도 혐오나 비하가 담긴 농담이 많을 것 같은데, 실제로 회사에선 어떤가요?

양파: 저희 팀의 95%가 유럽인이에요. 영국 문화를 잘 모르고 훨씬 더 여혐이 만연한 분위기에서 온 친구들이더라도 금방 적응해요. 여기서는 이런 식으로 하면 큰일 난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고 처벌 전례도 알고 있으니까요. 여혐 발언을 했을 때 주위 분위기가 완전 싸해지는 것을 한 번만 경험하면 순식간에 고쳐요. 이건 한국 남자들도 마찬가지에요. 해외 나가서 백인들 앞에서 대놓고 ‘너 여자가 뭐~’ 이런 말 할 사람 없어요. 비판적인 분위기가 본능적으로 느껴지거든요. 법제화가 되어있고, 처벌된 전례가 있고, 모임 내 리더가 ‘너 그딴 식으로 하지 마’ 이 한 마디만 해주면 게임 오버에요. 그 다음부터 안 해요.

특히 젊은 남자들이랑, 권력을 가진 남자들. 두 그룹은 ‘나를 보여야 한다, 내 자신이 이런 사람이다’ 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성향이 있는데 그런 그룹에서 한 사람이 약간 여혐적인 발언을 하고 그걸 다른 사람이 받아주기 시작하면 아주 급작스럽게 팀 분위기가 망해요. 이번에 하버드 입학취소 뉴스 보셨나요? 하버드 합격 통보를 받은 학생들이 페이스북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안에서 언피씨한(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이야기, 인종차별, 여혐 발언을 한 애들을 대학측에서 발견해서 한 번에 ‘입학취소’했죠. 그 학생들은 두 가지가 합쳐진 거예요. 젊고, 하버드에 들어간다는, 소위 내가 권력을 잡았다는 느낌. 그런 분위기에서 한 사람이 언피시한 말을 하기 시작하고 그걸 받아주다 보면 전체 분위기가 금방 썩어버리는 거죠. 그래서 외국도 법제화가 확실히 돼있고 그게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해도, 분위기가 어떻느냐에 따라서 괜찮은 곳도 있고, 망하는 곳도 있어요.

회로: 입사했을 때 성범죄나 성희롱에 대한 교육을 확실히 하나요?

양파: 하죠. 근데 비디오 10시간~20시간 보는 것보다 실제 예시를 듣는 게 훨씬 더 와닿고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전에 일하던 아무개가 파트너였는데 성희롱 하루 만에 잘렸대, 구글의 XX팀에서 헤드였는데도 여직원 인턴 추행했다가 한 번에 갔대. 이런 이야기요.

여성 직원이 성추행을 당했으면 인사팀에서 바로 조사에 들어가야 하고 증거까지 있다면 1주 만에 가해자가 인사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죠. 반대로 성추행 리포트를 했는데도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우버처럼 되는 거죠. 기업들은 이미지가 상하는 것을 무척 안 좋게 생각해요.

“페미니즘”

회로: 페미니즘에 대해서 글을 열심히 쓰고 계시잖아요.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양파: 블로그에서 메갈리아에 대한 글을 썼다가 욕을 먹어서 페북으로 왔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당장 지금 나에게는 큰 것이 아니라도, 다른 곳에서는 효율적으로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는 거예요. 엔지니어의 성격 특성 같아요. 저한테서 “양파는 해외 살면서 워킹맘으로 열심히 일하는데 한국 여자들은 한심하지 않냐? 걔네 다 취집하려고 한다.” 이런 말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원하는 만큼 벌고, 아이들도 키우는 상황이지만, “내가 한국 여자보다 열심히 일한다” 혹은 “나는 취집 이런 걸 상상도 안 하는 여자다.” 이런 걸 내세우려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한국 여자가 취집을 할 수밖에 없던 상황과 제가 여기서 일을 하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상황을 들여다봤으면 해요. 그건 제가 잘나서도 아니고, 한국에 있는 여자들보다 열정과 독기를 더 많이 가져서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메시지가 먹힌다는 것, 그걸 알게 됐어요. 먹힌다면, 해야지.

제가 글 쓰는 거랑, 한국 대학생이 글 쓰는 거랑 들이는 수고와 사고의 깊이가 똑같을 수 있어요. 다 똑같은데, 알량한 스펙 몇 줄로 제가 말 하는 게 열 배는 더 효과가 있다면, 안 하는 게 양심불량이지 않나 생각을 했고요. 내게 그렇게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약간의 욕 좀 먹는 거야 뭐. “한국 여자들은 게을러서 일을 안 하고 취집만 하려고 한다.” 제가 그걸 효과적으로 부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회로: 주위 친구들과 저는 양파님의 글 보고 많이 생각했어요. 특히 이공계여서 그런지, 양파님 글을 이공계 남성 친구들에게 보내면 조금은 이해를 하더라고요. 그게 전 너무 신기했어요.

양파: 제 안의 여혐이라고도 많이 이야기하는데 제 자신이 거의 20년 동안 남초 환경에서 일하다 보니, 말하는 방식이나 쓰는 방식이 조금 다를 거라고는 생각을 해요. 훈련인지 아니면 태생인진 모르겠지만, 남자들한테 좀 더 먹히는 게 있는 거 같아요. 그래도 구독자의 65%는 여자입니다.

회로: 원래는 남자 구독자수가 더 많았죠?

양파: 원래는 70~80% 정도는 됐죠.

회로: 저도 페이지를 알게 된 계기는 양파님의 페미니즘 글이 아니라 IT 관련 포스팅을 통해서였어요. 저희 단체는 과학기술중점대학에 재학하거나 졸업한 이들 중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인데요, 이공계에 맞는 페미니즘 교육이라든지 그런 것이 꼭 필요할까요? 제 안에서도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상태거든요.

양파: 한 사람의 사고방식을 그 사람의 성별로 단정하는 건 정확도가 제로에 수렴하겠지만, 큰 그룹으로 봤을 때 여성 그룹이랑 남성 그룹이랑 분명히 차이가 있어요. 이것 역시 타고난 부분도 있을 수 있겠으나 사회화 과정도 역할이 있겠죠. 이공계 대학에서는 그런 차이가 더욱 확연하게 보일 수밖에 없고요. 저와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어렸을 때부터 남자들이 많은 환경에서 일하고 공부해왔어요. 그러다 보니 악의가 있는 건 아닌데 같이 일하는 소수의 여성 동료를 제외하곤 ‘여자들은 수학 잘 못하니 내가 도와야 한다.’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어요. 이공계에서는 여성이 적다 보니 스테레오타입이 좀 더 견고해지죠. 그런 경우 제일 빨리 바꾸는 방법은 여성 남성 반반으로 같이 일하면서 직접 겪어보는 건데 현실적이지 않잖아요. 오히려 그렇게 억지로 바꾸면 스테레오타입이 더 심해지는 경우도 있어요. ‘여성들 사이에서 있으면 내가 여자인걸 잊어버렸다’고 한 말이 있었잖아요. 한국인들도 한국인들끼리만 일할 때엔 ‘한국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없어지죠. 이에 비춰본다면 여성들에 대한 여성들의 편견을 없애는 방법은 여성들만의 환경을 만들거나, 아니면 여자를 여자로 보기보다 사람으로 봐주는 것이 되겠죠!

좀 더 현실적인, 당장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이공계 개발자분들이 여성단체에서 여성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프로젝트를 하는 등의 접근 방식이 좋을 것 같아요. 자기가 풀고 싶어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금 상황이 뭔지를 알아야 되잖아요. 교육하는 분이 해준 이야기인데, <파리대왕>을 여자 아이들하고 읽을 때는 “주인공은 기분이 어땠을까?” 등의 질문을 하고 토론을 한대요. 남자 아이들에게는 책 속에서 언급된 섬이 있는데 섬 모형을 만들어 오라고 하고요. 근데 책에서 그 섬이 어떤 모양인지 정확히 안 나와있어 책을 정말 자세하게 읽어야 섬 모형을 만들 수 있어요. 남자 아이들은 정말 자세히 읽어가지고 모형을 만들어 온대요. 이 실험을 했던 선생님이 말하길 어차피 십대 남자 아이들한테 위의 질문을 물어봤자 “약하니까 맞은 거겠지”라고 해버려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대요.

정말 관심을 가지고 읽게 하려면 가르치는 방법을 다르게 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남자들에게 여자들의 처지를 이해해달라고 말하기보단, “네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냐?” 같은 도전 과제를 주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이해해달라고 해 봤자 “약하니까 맞았지” 이런 얘기만 나와요. 한국 남자들 이론이랑 똑같잖아요. “여자들이 약자니까 타겟이 되는 거지.” 그게 그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논리이기 때문이죠. “네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생각해 봐.” 라고 말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알아보는 동안에 ‘이게 정말 힘든 문제구나. 이런 이런 이슈가 있구나’라고 알게 되죠.

회로: 여성단체와 프로젝트 하는 아이디어 좋네요. 학부생들 데리고 한국여성의전화나 한국민우회 프로젝트 프로그램 만들기.

양파: 남자들 엄청 여혐했던 애들이 페미니스트로 바뀌는 거 순식간이에요.

회로: 주변에 혹시 그런 사람이 있으세요?

양파: 여혐하는 남자들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여성 전반에 대한 인식이 약간 바뀌는 거 같아요. 실제로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고, ‘추상적인 여성’이 아니라 ‘삶을 같이 하는 사람’이 되면서 ‘내가 잘못된 생각을 가졌었구나’ 라고 느끼게 되나 봐요. 여자들이 아무리 치안 문제 얘기해도 들은 척도 안하고 오히려 자기가 가해자 취급 받을게 더 큰 문제로 보이다가, 연애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이 어떤 삶을 겪는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이해하고 해결해주려고 했던 남자들은 쉽게 변해요. 제 경험으로는요.

물론 안 바뀌는 남자도 많아요! 여자들을 그저 같이 자고 싶은 존재로만 생각하는 남자들은 평생 안 바뀌기도 해요. “한국엔 그렇게 결혼한 남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다 여혐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데, 여성들이 불만을 얘기하는 사회와 그런 말이 안 나오는 사회는 다르다고 봐요. 가만히 있는 여자들이 문제라는 말은 당연히 아니고요. 저를 포함해서 어릴 때부터 착한 여자라는 이미지에 세뇌된 이들은 배운대로 착한 여자가 되려고 하는 것 같아요. “나는 문제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고 페미니스트도 아니에요. 저는 나대는 여자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여자들이 그런 이유겠죠. 그런 여자와 “나는 이렇게 (페미니즘 따위는 필요 없고 문제 제기 하지 않는) 좋은 여자랑 결혼했지만 다른 여자들은 다 김치녀고 꼴페미야.” 라는 남자와 만나면 천생연분이 탄생하죠. 여자는 “어차피 일하기 싫었다, 남자가 당연히 더 많이 벌어와야지.” 라는 여성 혐오 프레임을 선택할 수 있고. 남자는 “당연히 집에선 여자가 일을 다 해야지.” 라는 프레임을 취할 수도 있겠고요.

회로: 한국에서는 1년 전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여성들이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는 일이 많았고,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면서 커플끼리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관련 영상[3]도 나왔었잖아요. 커플인데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인해 싸우거나 헤어지거나 논쟁중인 커플 이야기요.

양파: 이제서야 페미니즘을 생각하기 시작한 경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생각하는 것이 틀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분 좋은 사람 없잖아요. 거부감 느끼는 게 당연하고, 자기 말이 옳다고 해주는 사람도 많다 보니까 싸우게 되는 거죠. 한 2~3년 지나면 훨씬 더 진정될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강남역 사건에 대해서 여성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훨씬 자기도 더 조심을 하고, 그게 평균이 되는 거죠. 그래야죠.

회로: 페미니즘 운동에서 남성이 어떤 역할을 하면 도움이 될까요? 이공계에서 잘 먹힐만한 어떤 특수한 역할이 있는지, 그리고 두 번째로 실제로 어떤 사람이 도움이 됐는지가 궁금합니다.

양파: 언제나 취업 문제가 있다 할 때면 공대 가라고 얘기하잖아요. 근데 공대 가라고 얘기하는 사람들 중에 공대 남자도 많겠지만 안 그런 애들도 많거든요. 그럴 때 정말 공대 다니는 남자가 “공대 다니고 있는 같은 동창들도 여자들은 취업 힘들어.” 그런 한마디 찔러 주는 게 정말 도움이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고요. 그리고, 게임 만들 거면 <서든어택2>처럼 부자연스럽게 큰 가슴을 선정적으로 부각시키는 장면 같은 것 좀 만들지 말아주세요!

요즘 기업들의 세계적인 추세가 젠더적으로 올바른 관점을 가진 회사, 여성친화적인 회사잖아요. 그런 걸 핑계로 대서라도 “야 너 취업하려면 그러면 안 돼.” 혹은 “구글에서는 그러면 완전 끝이래.”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잡아주면 좋겠어요. 그건 진짜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해주는 말이잖아요. 또 리더 입장에 있는 사람이 한마디씩 해주는 것도 도움이 돼요. 다 눈치보고 사는 인생이라서요.

회로: 외국에서는 어떤 방식의 운동이 전개되어 왔고, 현재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지요? 최근 주요 이슈라거나 논쟁거리가 있나요?

양파: 한국은 어떤 한 이슈가 뜨겁게 타오르면 다 알고 다 싸우잖아요. 근데 아무래도 영미권은 문화와 인종이 너무 다양하다 보니까 단결되기가 쉽지 않았는데 최근에 그들을 단결시킨 화두가 트럼프에요. 지금까지는 그래도 이 정도면 여자들 살만하지 않냐고 그랬다가 트럼프 당선되고 다들 당황한 거 같아요. 최근엔 <원더우먼> 개봉도 있었죠. <원더우먼>을 반갑게 맞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백인 여성 시오니스트 문화라는 비판도 있어요. 여성감독이 만든 여성주인공 영화라고 무조건 편들지 않고,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있어요.

회로: 그러고 보니 2017년 5월 미국에서 ‘마치 포 위민(March for women)’ 행사가 크게 열리기도 했네요. 우리나라는 인터넷이 발달돼 해외 이슈도 페북이나 트위터, 커뮤니티를 통해 실시간으로 언급돼요. 페페미, 트페미(트위터 페미니스트) 같은 넷페미 전성시대랄까요. 페미니즘 강연도 엄청 늘어나고 있고요. 2000년대 초중반 책도 뒤늦게서야 번역되고 있어요. 해외 페미니즘은 1900년대 이후 쭉 현재진행형인가요?

양파: 제가 보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2009년, 2010년 이후로 페미니즘 열풍이 부는 거 같아요. 한국에서도 메갈리아 이슈가 있었고 강남역 사건도 있었고요. 외국에는 ‘텀블러 페미니즘’이라고 텀블러에서 많이 이슈가 됐었나 봐요. 트위터도 그렇고. 그리고 ‘jezebel’이라고 여성들이 많이 가는 사이트가 10주년 됐대요. 여성들의 인터넷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사이트죠. 그 사이트 이후에 비슷한 사이트들이 많이 생겼어요. 점점 욕도 더 많이 먹지만, 점점 더 퍼져나간다고 생각해요.

 

“자신을 의심하지 말자”

회로: 이공계 페미니스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양파: 경제 발전이 엄청나게 빨랐고 조금만 노력해도 보상이 푸짐했던 사회였다 보니까, 한국에서는 남 탓 하는 것을 비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당연히 내 권리인데도 그걸 챙기겠다는 행동을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출산휴가가 있으면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건데 말이죠. 또 문제를 일으키면 트러블메이커로 보기 때문에 ‘내가 잘하면 할 수 있어.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돼. 괜히 남 탓, 사회 탓하지 말고 열심히 살자.’라고 세뇌된 것 같아요.

이게 맞는 말이긴 한데, 한국에서는 임계점을 넘은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적어졌어요. 노력에 비해서 보상이 좀 적은 건 상관이 없지만, 어느 정도는 비례해야 하잖아요. 한국에서는 그게 무너졌어요. 이런 상황에서는 너무 자기 탓을 하기 보다는 맞지 않다면 싸울 수 있는 용기, 아니다 싶으면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비판의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숫자가 넘어야 사회적인 변화를 유도할 수 있어요. 다 똑같은 마음일 순 없겠지만 같이 모여서 싸워야 합니다.

 

회로: 연대가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전문 분야인 일과 가정을 둘 다 꿈꾸는 여성 이공계 페미니스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드립니다.

양파: 제가 프로그래머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도 IT가 이렇게 뜰 줄은 몰랐어요. 2000년에 겪었던 한국과 15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도 많이 달라졌고요. 한국 내에 계신 분들은 답답하고 안 변한다고 느낄 수가 있는데, 밖에서 보기엔 그래도 매우 빨리 변하고 있어요. 세상은 빨리 변하고 한국은 더 빨리 변한다. 그러니 자신을 의심하지 말고 버티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명백히 노골적인 차별이 많이 사라지고 여성이 겪는 차별은 개인 ‘선택’의 영역으로 간주되면서 ‘여성이 겪는 차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모호해진 선진국과는 달리, 노골적인 성 차별, 폭력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여혐민국(한국)’. 한국에 비해 성 평등한 해외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지내온 양파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나라가 겪고있는 문제와 해법은 명확해 보였다. “세상은 빨리 변하고 한국은 더 빨리 변한다”는 말을 기억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믿고 꿋꿋이 버텨보겠다고 다짐해 본다.

[1] Why Women Still Can’t Have It All
[2] Anne-Marie Slaughter: Can we all “have it all”?
[3] 강남역 살인사건이 커플에게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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