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 1화. AAAS 여자들 ‘아재 과학자는 짜릿함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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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네의 ‘이상한’ 선거

지난 주말,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대표: 윤태웅 고려대 교수)’라는 단체의 2기 대표를 뽑는 선거가 열렸습니다. 후보는 셋이었습니다. 우리 중 누가 돼도 상관없다는 믿음으로 누구 하나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권력다툼과 줄 서기와 파벌 형성 등으로 얼룩진 기존의 조직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지요. 암실에서 내정된 후보가 차기 권력자가 되는 방식도 아니었습니다. 과학의 대중화, 대중의 과학화를 추구하는 단체의 이상에 꼭 맞는 민주적인 축제였습니다.

결선투표에서 한문정(서울사대부고 교사)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순간. 이진주(걸스로봇 대표), 이강수(BRIC 실장) 후보가 함께 축하하고 있습니다. 뒷모습은 차기 대표감으로 물망에 올랐던 김범준 성균관대 교수. 이 양반 역시 “50대 남성 교수 대표는 그만 보고 싶다.”며 고사하고 선거관리위원장을 자임했지요. 정말 남다른 사람들에 남다른 조직문화 아닙니까? ⓒ원병묵 성균관대 교수

후보 셋은 모두 달랐습니다. 둘은 여성이었고, 하나는 남성이었습니다. 올해 만으로 꼭 40세가 된 저는 그 중 가장 어리고, 가장 비전문적이며, 젠더 이슈에 대해 가장 진보적인 후보였습니다. <포스텍페미니즘>을 포함한 과학기술중점대학교 페미니스트 연대체 <페미회로> 젊은 친구들의 추천으로 발언권을 얻었습니다. 과학기술 전공자가 아닌지라 스스로 과학단체장이 될 깜냥은 못 된다 여기고 주저했습니다만, 그 친구들이 저를 통해 하고자 했던 바를 대신 전해야 한다는 소명의식 때문에 무대에 올랐습니다.

새 대표로 선출된 한문정 당선인(서울사대부고 교사)은 50대 여성 과학교육 전문가로, 저와는 나란히 ESC 1기 집행위원회에서 일한 ‘언니’입니다. ‘신나는 과학을 만드는 사람들(신과람)’ 이사로 활동하며, 오랜 세월 과학교육의 혁신과 과학대중화를 위해 일했습니다. 지금보다 더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과학기술계에 젠더적인 균형을 더했지요. 과학교수, 과학교사, 과학덕후 등 다양한 회원들의 고른 추천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함께 후보로 나섰던 이강수 후보(생물학연구정보센터 BRIC 실장)는 ‘열린정책위원회(위원장: 김기상)’의 압도적인 지지에 등 떠밀려 나온 40대 남성 과학정책 전문가였는데요, 실무는 기똥차게 잘하면서도 권력의지는 전혀 없는 양반이었습니다. 선거가 시작되자마자 영페미 친구들과 함께 저를 추천하고, 당일 무대에 올라서까지 제 선거운동을 하는 ‘기행’을 선보일 정도였으니까요.

 

시대정신으로서의 과학, 시대정신으로서의 젠더

회원 360명, ‘현재 스코어’ 과학기술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신생 조직의 선거에, 비전공자인 저를 포함해 세 명 중 두 명의 여성 후보가 등장했습니다. 이 ‘사건’ 또는 ‘현상’을 보고, 안팎의 많은 이들이 놀라고 감탄했습니다. 현 대표인 윤태웅 고려대 교수가 스스로 자아비판하며 하는 말도, 이번 선거의 유일한 남성이었던 이강수 후보가 연설 중에 농을 섞어 한 말도 같았습니다.

“과학기술 단체장에 50대 남성 교수가 앉아있는 그림은 이제 그만 좀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건 하나의 사건이고 현상이었지요. 부인하거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이기도 했습니다.

ESC는 지난해 ‘촛불 정국’ 전후, 과학기술계는 물론 정치 사회 역사적인 주요 장면마다 진보적 리더십을 발휘해 온 과학기술인 단체입니다. 유례 없는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으로 이어진 시국선언에 과학기술계 최초로 참여했고, 그 형식 또한 논문의 틀을 따라 큰 화제가 됐습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살아 있는 권력과 여전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과학기술 본연의 합리성과 불편부당함에 입각한 판단들을 해왔습니다. ‘광화문 1번가’에 과학기술계 대표로 나서 기초과학과 과학정책, 과학교육, 청년연구자의 노동, 과학기술계 젠더문제 등에 대해 소신 발언했고, 과학기술계 고위직 인사가 파행을 겪을 때는 제살을 깎는 마음으로 제일 처음 문제를 제기했지요.

정치적인 일만 해온 것은 아닙니다. 이강수 후보가 주도하는 생물학연구정보센터 BRIC과 함께 과학기술정책 타운미팅을 열고 아래로부터 과학기술정책의 의제들을 모으는가 하면, ‘바른 과학기술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과실연, 상임대표: 노석균 전 영남대 총장)’과 공동으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반과학적인 정책에 항의하는, ‘함께 하는 과학행진(March for Science)’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저도 ‘사이언스 버스킹: 과학을 말하다’의 진행자 및 ‘더 핑크부스’의 기획자로서 함께 했습니다. 영페미 연구자들과 함께 실험실 가운을 입고 하이힐을 신고 바비처럼 머리를 말고 화장을 한 채 광화문을 행진했지요.

최근에는 과학기술을 국가 경제발전의 도구로 여기는 헌법 제127조의 개정을 청원하는 개헌안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속한 열린정책위원회에서 헌법개정 TF(팀장: 김래영)를 꾸리고, 오세정 의원실과 협력해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지난해 4월, 과학의 달을 맞아 ESC와 바실연이 공동주최한 ‘함께 하는 과학행진(March for Science)’. 과학과 여성성은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더 핑크부스’를 차리고, 메이크업 아티스트 12명을 모셨습니다. <걸스로봇> <페미회로>의 영페미 과학기술인들과 함께, 머리를 말고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찢어진 청바지에 미니 스커트를 입고 실험복을 입었죠. 2년 전, 걸스로봇 런칭파티에서부터 시도하고 싶었던 아이디어였지만, 신생 스타트업이 하기에는 과학계와 페미계 양쪽에서 오해를 받을 수 있어 좀 위험했습니다. 그 레퍼런스를 얻었던 것이, 지난해 AAAS 연례회의였어요. 천하의 AAAS에서 신규 멤버십에게 메이크업을 하고 프로필 사진을 찍어주고 있더라고요. 아이디어는 걸스로봇이 먼저였지만, 실천은 AAAS가. 슬프지만 이렇게 강력한 레퍼런스를 믿고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 ⓒ윤신영 동아 사이언스 기자

 

어떻게 그리 속속들이 알고 있느냐고요? 2년 전, 이 단체가 제주도에서 처음 설립됐을 때, 저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요. 공동 발기인이자 홍보이사로서 ESC의 첫 걸음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과학기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으로 함께 공부하고 행동하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미약하나마 더 나은 과학과 더 나은 사회를 함께 추구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어 기쁘기도 했고요. 개인적으로는, 오래 전 하나의 사건 때문에 놓아버렸던 ‘과학공부’를 계속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 사건 역시 미투와 관련된 것이었지요. 사소하지만 인생의 방향을 돌려놓은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활동의 근간에는 과학기술은 국가나 상아탑 엘리트의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의 공공재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과학이 모든 시민의 것이라고 할 때, 그 모든에 여성의 자리는 있을까요?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는요? 다른 성 소수자들은 어떨까요? 청년은요? 장애인은요? 외국인은 또 어떤가요?

세계 최대 과학단체 AAAS의 현직 회장인 수전 호크필드 MIT 뇌과학과 교수의 초대의 글. 올해의 주제는 “진보하는 과학: 발견에서 응용까지”입니다. 걸스로봇은 현장에서 과학기술계 여성 리더들을 만나고, 여성/젠더 세션에 참여해 집중 취재할 계획입니다. ⓒAAAS 홈페이지 갈무리

ESC는 과학적 합리성민주시민의 교양이라고 믿습니다. 과학기술을 전공하지 않은 저조차도 기쁘게 ‘진성 회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열린 조직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와 열림은 반드시 서로 이어집니다. 다양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과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ESC라는 과학기술인 단체가 두 명의 여성 후보와 젠더의식 있는 남성 후보를 대표 선거에 내놓았고 마침내 여성 대표를 세웠다는 것은, 젠더 문제가 과학기술계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정신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하나의 상징일지도 모릅니다.

마침 세계 최대 과학단체 AAAS의 전직, 현직, 차기 회장이 모두 여성이고, 우리나라의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회장: 김명자)’ 대표도 여성이군요. 걸스로봇이 전세계 과학기술계를 움직이는 여자들을 직접 만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고 듣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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