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의 비하인드 1 : 폴 오 UNLV 교수, ’아이언 링’을 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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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신문을 통해 연재하는 로봇계 사람들의 딥 인터뷰 <이진주의 비하인드>를 소개합니다. 국내외 거물급 연구자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들어보세요.

http://www.irobot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59 (3월 19일자)

지난 3월 8일부터 10일까지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시에서 사흘간 열린 ‘IEEE International Workshop on Advanced Robotics and its Social Impacts 2017(ARSO2017) 워크샵 현장에서 걸스로봇 이진주 대표가 폴 오 UNLV 교수를 인터뷰했다. 그 내용을 게재한다. (편집자)

모두가 그를 사랑하고, 모두가 그에게 의지한다. 전 미국 NSF(국립과학재단) 로보틱스 분야 디렉터 폴 오(Paul Oh, 한국명 오필호. 51세) UNLV(University of Nevada, Las Vegas) 교수 얘기다. 로봇계의 ‘보스’, 폴 오 교수를 지난 8일에서 10일까지 사흘간 밀착 취재했다. ‘ARSO2017’ 워크샵이 열린,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시의 학회장에서였다. 그는 이 학회의 프로그램 체어였다.

▲ CES 윈터스쿨에서 강의하는 폴 오 교수. (사진 촬영 = 걸스로봇 이세리 펠로우)

한국과 미국을 잇는 다리

그의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모인다. 모여든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음을 터뜨린다. 생전 처음 보는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자문을 구하는 이들도 많다. 그는 자신을 믿고 속내를 털어놓는 사람들에게 누구도 하지 않았던 솔직한 조언을 건넨다. 관여하는 학회에 초대하고, 논문을 지도하며, 유력가를 소개해 길을 터주기도 한다. 이 바닥 새내기 중 그에게 한 번이라도 신세지지 않은 이는 없을 게다.

필자 역시 그랬다. 처음 가본 학회장에서 ‘월 플라워(무리에 어울리지 못하고 벽지의 꽃무늬처럼 구석에 붙어 있는 외토리)’처럼 오그리고 있는 내게, 그는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다. 그 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동물의 세계는 그렇다. 대장이 그룹에 받아들여주면, 어떤 아웃사이더라도 쉽게 인사이더가 될 수 있다. 그런 그에게 내가 붙인 별명은 ‘보스’. 그는 표정도, 행동도, 목소리마저도 보스다.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면 영화 <대부>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는 미국 내 로봇 연구자들의 대부로, 한미 로봇계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젊은 연구자들의 멘토이기도 하다.   폴 오 교수가 다리 역할을 시작한 건 10여 년 전부터였다고 한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여기저기 수소문해 한국계 미국인 로봇공학자들의 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아놓고 보니 스물다섯 명 정도였다. 그 중에는 슈퍼스타가 된 데니스 홍 UCLA(당시 버지니아공대) 교수도 있었다. 시일이 흐른 지금은 서른다섯 명 정도로 늘었다고 한다. 그런 일에는 품이 든다. 그리고 쓸데 없는 오해가 끼어들기 쉽다. 마음이 있어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다.

“왜 그런 일을 시작하게 된 거죠?” 그는 갑자기 또박또박한 한국어로 대답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첫사랑을 기억한다고들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학자들도 첫 스폰서를 기억합니다. 자신의 연구를 시작하도록 도와준 이를 잊지 못하죠.” 신진학자들에게 연구자금을 끌어오는 일은 쉽지 않다. 초기에 어디서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안정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갈린다.

오 교수는 한국 기업들이 ‘월드 클래스 리서치’를 하겠다면서, 이미 큰 성공을 거둔 미국인 대가들에게 백만 달러 단위의 연구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대가 한 사람에 쏟아 부을 돈이면, 신진 열 사람, 스무 사람을 지원할 수 있거든요. 그렇게 시작한 교수들이 한국계 학생들을 받아 키우고, 연구성과를 한국기업과 공유할 수 있게 된다면, 기업 입장에서도 훨씬 큰 보상을 받는 셈이지요.” 오 교수가 그 일을 스스로 떠맡게 된 건, 미국 내 일본계 연구자들에게 자극을 받아서였다. 타케오 카나데 전 CMU 교수, 해리 아사다 MIT 교수 같은 쟁쟁한 학자들은 모두 히타치 같은 일본 기업에서 펀딩을 받고 커리어를 열었다고들 했다. “저는 그런 일본 모델을 본 받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그 일을 왜요?” 나는 재차 물었다. “애국심 때문에요?” 그는 웃었다. “사실 전 미국 시민이고, 미국이 저의 조국이죠. 하지만 제 마음 속에는 부모님의 나라, 제 근원인 한국에 대한 마음이 있어요. 그걸 애국심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헤리티지라고 해야 할까요.” 해외에서 보낸 세월이 60년이 넘는다는 오 교수의 어머니는 아직도 한국 뉴스를 보고, 한국을 조국이라 여긴다고 한다. 그에게는 그런 부모님의 나라를 더 알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청년 폴은 1989년 문교부가 주는 장학금을 받고 서울대로 어학연수를 왔다. 다른 이들은 왜 한국에 가느냐고 의아해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은 정치현실이 불안정했다. 시위도 심했다. 대학은 일종의 유토피아였고, 실제 현실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가 속한 해외교포 커뮤니티는 일반적인 대학가의 분위기와도 사뭇 달랐다. 그는 기숙사가 있던 대학로 주변에서 친구들과 부대찌개를 먹고, 압구정동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던 일을 회상했다. 자라온 문화가 달라선지, 한국은 알면 알수록 이해하기 힘든 나라였다. 폴 오 교수는 작은 아버지 고 오기형 연세대 교수(교육학과. 오준호 KAIST 교수의 부친)가 했던 말씀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을 이해한다는 건, 한국을 슬퍼할 수 있다는 뜻이란다.”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 사회에는 선택의 여지란 것이 없어요. 실패할 수 있는 기회도 없죠. 미국에선 감옥에 갔다 와도 두 번째, 세 번째 기회가 있는데, 여기선 대입에만 실패하면 오랜 시간을 바쳐도 회복하기 어려워요. 무슨 직업에 종사하건 일과 생활의 균형이란 문제도 해답을 찾기 힘들죠.” 그의 말투에서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래서 한국은 생각할수록 슬픈 나라가 됐어요.” 한국이 가슴에 맺히다 보니,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리더 역할에 익숙했고, 이번에도 흩어져 있는 한인 연구자들을 모았던 것이다. 기업의 펀딩을 따오는 데는 큰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국가기관의 일을 맡으면서 그의 네트워크는 빛을 발했다.   그는 2008년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의 로보틱스 디렉터로 부임했다. 당시 만 42세로 프로그램 디렉터로서는 최연소였다. NSF의 로보틱스 분야는 1980년대 시작된 프로그램이다. 한국계인 여준구 당시 하와이대 교수에 이어 디렉터를 맡았던 중국계 조지 리 교수가 퍼듀대로 돌아가면서, 다시 그 자리를 폴 오 교수에게 제안했다.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닌가 고민했지만, 조지 리 교수는 ‘젊은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며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NSF 로보틱스 분야의 자금은 2천만 달러 이상이었다. 폴 오 교수는 2010년까지 디렉터로 일하는 2년 동안, 군사 목적이 아닌 대학 중심 연구 분야에 펀딩의 90퍼센트 이상을 사용했다.

사촌형님인 오준호 KAIST 교수가 ‘휴보’를 개발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일본의 ‘아시모’가 있는데 뭐하러 뒤늦게 이런 걸 개발하느냐고, 주변에서 오준호 교수를 만류했다고 한다. 폴 오 교수도 처음에는 비관적이었다. 그런데 오준호 교수는 “한국에도 아이콘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는 거다. 시간낭비라는 비판에는 “내 시간이다.”라고 대응했다. 그 모습을 본 사촌동생의 마음도 움직였다. 무모해 보이던 도전 끝에 휴보가 세상에 나온 건 2008년이었다.

휴보를 중심으로 한 한미 양측의 협업이 처음 논의된 것은, 2006년의 일이었다. 당시 드렉셀 대학에 있었던 폴 오 교수는 버지니아 공대의 데니스 홍 교수, 펜실베니아 대학의 댄 리 교수(GRASP 랩 디렉터)와 같은 대학 마크 임 교수(‘모듈러 로봇’의 권위자)의 학생들까지 대규모로 팀을 꾸려 휴보랩을 방문했다. 당시 휴보는 아직 개발 중이어서 미국에 파견해 공동연구를 할 단계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07년 미국의 내셔널 아카데미가 국제협력을 필수화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그 때까지 미국의 공대생들은 굳이 다른 나라에 나가 문화를 체험할 필요성을 딱히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기업은 변하고 있었다. 보잉과 같은 글로벌 회사들은 국제 문화에 대한 기술도 익힐 것을 요구했다.

폴 오 교수는 기획 단계에서 접어두었던 휴보랩과의 협업을 다시금 꺼내 들었다. 미국이 세계 제일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도, 자동차를 정말 좋아한다면 독일에 가서 포르셰, 이탈리아에 가서 페라리를 보고 오는 것처럼, 로봇을 좋아하면 한국에 가서 휴보, 일본에 가서 아시모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단다. 당시 2.5백만 달러의 펀딩을 받아, 데니스 홍 교수와 댄 리 교수의 협업을 추진했다. 로보컵을 경험한 데니스 홍 교수는 ‘미니 휴보’를 맡고, 하버드대 물리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MIT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은 뒤 컴퓨터 사이언스 쪽으로 들어온 또 하나의 ‘천재’ 댄 리 교수는 ‘버츄얼 휴보’를 담당했다. 미니 휴보 프로젝트는 향후 ‘로보티즈’와의 협업으로 ‘다윈OP’로 결실을 맺었다. 따라서 “휴보는 코리안 로봇이 아니라, 글로벌 로봇”이라는 것이 폴 오 교수의 생각이었다. “우리는 오픈 아키텍처, 크라우드 소싱, 국제 협력의 개척자들이었어요. 성공의 지표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다수의 박사와 50여 개의 논문들이 나왔죠. KAIST의 서남표 총장은 당시 이런 국제적인 협력을 매우 환영했어요. 10명이 넘는 미국인 학생들이 KAIST에 파견됐고, 휴보도 미국에 여러 대 수출했으니까요.”

▲ 폴 오 교수는 IEEE 로봇학회의 여러 행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봉사하고 있다. 남다른 사명감이 있어서다. 지난 8일부터 10일까지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열린 ARSO2017 워크샵에서, 조직위원장인 오스틴대학 루이스 센티스 교수와 함께.

2010년 폴 오 교수가 제안하고 같은 드렉셀대 동료 김영무 교수가 이끌었던 이른바 ‘재미 휴보 프로젝트’다. ‘이해충돌방지원칙’을 엄격히 지키는 NSF의 규정 때문에, 폴 오 교수는 이 프로젝트를 직접 담당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드렉셀대는 물론, 펜실베니아대(UPenn), 버지니아공대, 조지아공대, 퍼듀대, 남캘리포니아주립대, 오하이오주립대 등 7개 학교에서 휴보를 구입했다. 당초 카네기멜론대(CMU)의 제임스 커프너 교수도 참여했으나, 이후 그의 제자인 조지아공대의 마이크 스틸먼 교수로 교체됐다. 싱가포르 국책연구기관인 정보통신연구소가 1대, 구글도 각각 2대씩을 샀다. 우리 정부와 기업 어디서도 휴머노이드에 대한 펀딩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였다. “어쩌면 그 프로젝트가 2015년 휴보의 DARPA 로보틱스 챌린지 우승의 근간을 만든 셈인 거죠. 저는 그게 자랑스러워요.” 슈퍼스타 데니스 홍을 비롯해 국내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댄 리 교수나 마크 임 교수 모두, 한국에 별로 아쉬울 게 없는 톱 클래스 연구자들이다. 학계에서는 이미 충분히 인정받고, 미국 내 펀딩도 충분하다. 그런데도, 한국과 관련된 일에는 여전히 마음을 쓴다. 폴 오 교수는 말했다. “헤리티지인 거죠. 헤리티지가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어요.”

다르파 챌린지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목소리는 다소 높아졌다. “2013년 플로리다에서 트라이얼을 할 때, 한국에선 딱 한 팀이 취재를 왔더라고요. 한국 정부는 아예 관심도 없는 것 같았어요. 일본계보다 한국계 팀 리더들이 훨씬 더 많았는데 말이죠.” 그 때 데니스 홍 교수도 “더 많은 프로모션이 필요하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로봇이라는 분야가 왜 중요한지, 한국에 애정을 가진 재미 연구자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더 알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거다.

2014년 길 프랫 당시 다르파 프로그램 매니저(현 토요타로봇연구소 TRI 대표)가 각국 정부와의 협력사항을 이렇게 언급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와의 협력은 매우 성공적이다. 유럽 정부와의 협력은 성공적이다. 그런데 한국 정부와 접촉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그 때 폴 오 교수가 나섰다. 오준호 교수를 통해 지경부가 펀딩에 참여했다. “KAIST의 휴보, 로보티즈의 ‘똘망’ 등 3-4팀이 파이널에 참여할 수 있게 됐어요. 그랬던 휴보가 우승을 했으니, 정말 아름다운 신데렐라 스토리인 거죠.”

우승의 뒷얘기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섭섭하지는 않았을까. “저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요. 갚지 않아도 돼요. 우리는 단지 국제 협력이 성공한 사례가 필요한 거예요. 국제 협력의 제일 쉬운 방법이 미국에 있는 한인 학자들을 활용하는 거죠.” 다르파 챌린지에서 한인 학자들 사이의 협력은, 가히 ‘형제애’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미국의 동료관계는 지극히 일에만 한정돼 있어요. 반면 한국의 동료관계는 보다 끈끈하고 깊죠. 재미있어요. 우리는 한국에 애정과 헤리티지를 가지고 있어요. 재능 있는 한국인들이 종종 국제적으로는 고립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그런 고립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저는 기뻐요.”

대단한 형제들


같은 세대의 사촌 형제가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자리를 잡은 로봇계의 권위자라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이 대단한 로봇 가문의 가계도를 그려보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저희 아버지 오기송 박사는 5형제 중 셋째셨어요.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일본 게이오

▲폴 오 교수 부친인 오기송 박사가 쓴 도서

대 법대를 나오셨죠. 1958년 펜실베니아대 정치학과로 박사과정을 하러 가신 게 미국생활의 시작이었어요.” 오준호 교수의 부친인 고 오기형 교수는 형제 중 다섯째, 역시 일본 와세다대를 나와 폴 오 교수의 부친보다 몇 년 앞서 컬럼비아대 교육학과로 박사과정을 하러 갔다. 아버지의 다른 형제들도 모두 언어학, 종교학 등 인문사회학을 했다고 한다. 당시에 다섯 형제가 모두 박사를 했고, 각자 저서들을 남길 정도로, 학구열과 성실성, 두뇌 모두 남다른 집안이었던 것 같다.

폴 오 교수의 아버지는 한국의 정치상황이 혼란스러워 들어오지 못하고 미국에 남았다. 지금은 통일교육과 영재교육에 관한 연구를 한다. 오준호 교수의 아버지는 귀국해 연세대에 자리를 잡았다가 2008년 세상을 떴다. “아버지 세대와 달리 저희 세대는 다 엔지니어예요. 그런데도 여느 인문사회학자 못지 않게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기술을 통해 봉사해야 한다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요.”

집안은 오래도록 신실한 믿음을 지켜왔다. 특히 큰아버지의 아들이자 장손이었던 고 오인호 청년의 죽음은, 오씨 일가를 넘어 미국 내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전설처럼 전해지는 미담이 됐다. “펜실베니아대에 유학 중이던 인호 형님이 26세의 나이로 흑인 청년에 의해 무고한 희생을 당했어요.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큰아버지는 그 죽음에 책임을 묻는 대신 가해자 청년을 석방해 달라는 청원서를 쓰고, 못 배우고 가난한 흑인 커뮤니티를 위해 기도하며 모금운동을 벌였어요.” 미국인들은 보통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슬픔 앞에서 의연한 태도를 보인 그들 가족의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 그가 사고를 당한 해밀턴 거리에는 죽은 인호씨의 이름을 딴 도로가 생겼다. 이 사연은 훗날 ‘한국에서 온 편지’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런 집안 분위기 덕분에 폴 오 교수는 한국에 출장 와서도 술자리를 갖기 보다는, 대부분의 시간을 조용히 기도하며 보낸다. 11대와 12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오준호 교수의 어머니 김현자 여사는 YWCA를 중심으로 한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의 대모다. 오준호 교수의 부인 윤혜선 여사 역시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YWCA 여성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가족들은 매년 집안의 또 하나의 고향인 필라델피아에서 가족 모임을 연다. “우리 가족은 일 년에 한 번씩 모여 가족 학술대회를 해요. 각자 전공분야에 관해 한 시간 동안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서로 배운 것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진짜 학술대회처럼 앉아서 열변을 토해요.” 어린 시절에는 놀아도, 각자 전공들이 정해진 뒤에는 꼼짝없이 참여해야 했다고 한다. 강연을 마치면, 질의응답과 날 선 공방이 이어진다. “우리 아버지들은 참 특이했어요. 정치학자인 아버지는 통일정책에 대해 집중하는 한편, 영재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이셨어요. 책도 그쪽 분야로 쓰셨죠. 교육학자인 준호 형 아버지는 1980년대에 컴퓨터를 어떻게 교육에 적용할지를 연구했어요. 사람들이 아직 PC를 채 갖기도 전에요. 그래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죠. 가계도를 그리실 만큼 집안의 내력과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하지만 그들 가족의 교육법은 일반적인 한국가정이나 알려진 영재교육과는 상당히 다르다. 가풍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집안의 어른들은 무엇을 ‘재능’이라고 볼 것인지를 보는 관점이 비슷하다고 한다. 아이들을 억압하지 않고 격려하는 점도 비슷하다. “준호 형 아들은 그림을 그려요. 픽사 디자이너(*참고: 작가 에릭 오 홈페이지 erickoh.com, 그가 만든 휴보 그가 만든 휴보 애니메이션 http://youtu.be/twztSDmujkA)죠. 그 경우 보통은 공부하라고 꺾는데, 형은 아들의 재능을 꺾지 않았어요. 고 2인 제 큰딸 올리비아는 뮤지컬을 좋아해요. 작은딸 소피아는 태권도를 좋아하고요. 저희 부부는 절대 아이비리그를 강요하지 않고, 학원도 보내지 않아요. 그냥 프로그래밍을 하며 놀죠. 한인들은 어디서나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모습이 비슷해요. 하지만 저희 가족은 아이들을 그냥 놔둬요.”

자칫 방임처럼 보이지만, 아이들의 재능과 성향을 정확히 꿰뚫어본다. 폴 오 교수는 말했다. “저도 9학년 때까지 되게 나쁜 학생이었어요. 학교에 별로 집중하지 못했고, 성적도 안 좋았죠. 그런데 사촌 형들이 다 엔지니어여서 비행기 만들고 그러는 게 되게 부럽고 멋있더라고요. 선생님이 성적이 나빠서 공대에 못 간다고 했어요. 그 때부터 진지하게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오준호 교수 역시 마찬가지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라디오를 뜯고 딴 생각을 하느라 70여 명 중 50여 등을 하는 성적이었다고 한다. 시대가 변해서 학생들이 공부에 몰리는 압박감이 다르고, 유전자에 대해 얘기하는 건 정치적으로 올바르진 않지만, 가끔은 그런 의심이 강하게 들 때가 있다. 환경은 거들 뿐, 사실은 유전자의 일이 아닌가 하는.

그는 말했다. “저는 기독교인이니까 그런 배경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하느님이 우리를 목적에 이르도록 이끈다고 믿어요. 부모님이나 멘토들은 주위에서 돕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아이들이 가지고 태어난 재능, 생김새 같은 것들이 따로 있고, 그것을 통해 사회에 봉사하며 신에게 다가가는 거죠. 그 목적에 이르는 길이 꼭 하버드로 이어진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딸 바보 아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자녀교육으로 이어졌다. 그에게는 딸이 둘 있다. 그래선지 <걸스로봇>의비전과 활동에 대해서도 우호적이다. 딸바보 아버지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을 더 잘 알게 된 걸까. 자신의 딸은 아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르치는 법이 있을까. 이런 질문을 접하고, 폴 오 교수의 얼굴엔 당혹스런 기색이 흘렀다. “’여자라서 어떻게 키워야 한다?’ 특별히 그렇게 생각해봤는지는 모르겠어요. 복잡한 기분이 드는데요.”

   그는 ‘더 많은 여성인력을 키워야 한다’는 주제로 열린 한국 정부 주재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때 ‘여성인력’이라는 단어에 당혹감을 느꼈단다. “중국은 정부 관리와 기업 CEO의 여성 비율이 더 높아요. 그런 점에서 한국이나 일본보다 더 열려 있죠. 같은 아시아 국가라도 한국이나 일본은 아직까지 여성의 역할을 아이 키우는 데 한정 짓는 경향이 더 큰 것 같아요. 대학까지 잘 배웠다가도 막상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애들 학원에 데려다 주는 일을 하죠. 근데 스웨덴 같은 곳에선 사회적인 인프라가 아이들을 함께 키우기 때문에 여성들이 배운 걸 일터에서 활용할 수 있어요. 더 매력적인 직장과 사회를 만들어 잠재력 있는 여성을 더 끌어내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자기 딸을 ‘여성인력’의 차원으로만 보는 아버지는 많지 않을 것이다. 폴 오 교수는 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고 했다. “결혼할 생각을 해 봤니? 남편은 어떤 사람일 것 같니? 아이들은? 딸들은 처음엔 ‘그게 뭔 소리야’ 그러지만, 곧 생각을 해요. 외교관과 결혼한다고 생각해 봐. 남편을 따라 항상 떠돌아다녀야 하지. 군부독재가 있고 가부장제가 센 곳에 간다고 생각해 봐. 의사랑 결혼한다고 생각해 봐. 너무 바쁘고 지쳐서 가정에선 죽은 사람처럼 지낼지도 몰라. 목사와 결혼한다고 생각해 봐. 교회에서 파티 열고 봉사하고 뉴스레터를 만드느라 네 모든 시간을 써야 해. 그런 게 네가 생각하는 인생인지 한 번 상상해 봐.”

나는 곧 반감이 들었다. “아니 왜 딸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무슨 직업을 갖고 싶은지를 묻지 않고, 남편에 대해서 묻죠? 결혼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는 빙그레 웃었다. “누구와 결혼하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은 어떤 파트너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런 종류의 인생을 살게 되기 때문이에요. 물론 남편과 아이들을 상상해 보다가 결혼하지 않게 되고 싶어질 수도 있죠. 그럼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봐주는 연습을 더 많이 하면 돼요.”

그건 내게도 충격적인 말이었다. 우리 세대의 여자들은 공부만 잘하면 뭐든 될 수 있다고 교육 받으며 자랐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 건 당연한 옵션처럼 여겨졌다. 그 두 가지가 이토록 불친절한 사회구조 속에서 이토록 맹렬히 충돌하리란 건 알지 못했다. 바로 다음 세대의 여자들이 ‘결혼파업’, ‘출산파업’을 일으키는 건 그래서다. 나는 걸스로봇을 통해 다양한 가족구조를 이루고 다양한 인생을 사는 여성 롤모델을 보여주려고 한다. 일종의 시뮬레이션을 하라는 것.

“그건 시뮬레이션이네요?” 내가 물었다. “네, 시뮬레이션인데요, 저는 그걸 ‘라이프디자인’ ‘라이프코칭’이라고 불러요. 세상을 보는 관점을 훈련하는 거죠. 신이 주신 삶의 목적에 대해 생각하고, 그 길을 찾아보는 거죠. 예컨대 결혼이란 건 퍼스낼리티의 매치가 아니라 릴레이션십의 매치예요. 어떤 남편을 만날지 상상하라는 건, 거꾸로 내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알라는 주문이에요. ‘외교관 부인, 의사 부인, 목사 부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먼저 나의 취향부터 경제관까지 두루 살펴보고, 나와 좋은 파트너십을 맺을 수 있는 상대를 찾으라는 거죠. 하다못해 직업적인 사이클부터 말이에요.”

그런 질문 끝에 나오는 것은 일반적인 대답이 아니다. 뮤지컬을 좋아한다는 큰딸은 직업적으로서는 추구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일이 얼마나 힘들지 알기 때문. 일하는 한편 가정을 유지하며 학생들에게 즐겁게 뮤지컬을 가르칠 수 있는 연극반 지도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란다. 그는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국어(영어)와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작은딸은 아빠를 닮아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지만, 어딘가에 취직해 출퇴근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단다. 조직에 속해 있는 교수나 연구원이 아니라, 프리랜서로 일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려고 코딩을 배운다고 했다.

멘토와 멘티

그는 아버지로서도 멘토로서도, 사람을 키우고 가르치는 일에 남다른 재능을 가졌다. 그래선지교수라는 직업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어떤 회사도 교수를 생산하지 못해요. 오직 교수만이 교수를 배출할 수 있어요. 멋지지 않아요? 내 학생들이 다른 누군가의 스승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제 소명이에요.”

 

▲ ARSO 워크숍 마지막날, 미팅을 마치고 일부러 오스틴대를 찾아와 젊은 한인 연구자들과 만났다.

그는 2000년에 교수가 됐다. NSF 디렉터 2년을 제외하고, 15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피터 앨런 컬럼비아대 교수의 제자로, 드론으로 시작해 휴머노이드까지 관심 영역을 넓혀왔다. 그 사이 열 명의 박사를 배출했고, 그 중 네 명이 교수가 됐다. “승률 40퍼센트죠.” 그는 악동 스포츠맨처럼 웃었다. 지난해 9월 코네티컷주 햇포드대에 부임한 손기원 교수는 DRC팀의 캡틴이었다. 로봇 퍼셉션과 모션 플래닝, 모션 컨트롤, 머신러닝까지 한다고 했다. 한인 제자만 받는 건 아니다. 크리스 코펠라 미 육사(웨스트포인트) 교수는 드론 전공, 댄 라파로 조지메이슨대 교수는 휴머노이드, 첫 박사 제자이자 루마니아 출신 티미스웨라공대(Timisoara) 교수는 산업 자동화와 산업용 로봇을 한다. 다른 제자들은 미 해군, 록히드마틴 등에서 일하거나 스타트업을 운영한다.

   “저는 더 이상 피터 앨런의 제자가 아니에요. 같은 교수죠. 학자를 키워내는 일은 사자 새끼를 키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느 순간 동료이자 경쟁자가 되죠. 사람에 따라 학생에게 인색하고 제자를 견제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저는 그런 제자들을 배출하는 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건 오직 교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책임이니까요.”

그는 ARSO 워크숍 외에도 IEEE 다수의 학회에 관여한다. 올 6월 제주에서 열리는 URAI2017의 조직위원이기도 하다. 학술적인 업적이 쌓이지 않은 초임 교수였을 때부터, 스페셜 워크숍이나 튜토리얼을 열어 사람을 모았다. 이번 ARSO2017 워크숍의 프로그램 디렉터로 참여하면서도, 행사 마지막날 일부러 오스틴 대학에 들러 한인 연구자들과 유학생들을 찾아봤다. 박사를 마치고 각각 엑소 스켈레톤과 뉴로 로봇 회사를 차린 연구자들과 휴머노이드를 연구하는 박사과정 학생들이 자리에 모였다. “어떻게 교수가 돼 학계에 진입할 수 있나요?” “연구만으로도 힘든데, 언제 커뮤니티 빌딩을 하고, 어떤식으로 평판을 쌓죠?”

폴 오 교수는 멘토링을 이어갔다. “누구를 아느냐, 어떤 리더십을 갖고 있느냐는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누구를 알고 있는지 알기 전에는 함께 일하고 싶어하지 않죠. 커뮤니티를 조직하고, 커미티에 속해 있으면 신뢰가 쌓입니다.” 그는 과거 한인 학생회장으로 일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내가 개인 자격으로 어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유명인을 만나고자 하면 잘 되지 않아요. 누구? 하고 무시당하죠. 바쁘니까요. 하지만 내가 어떤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 조직과 함께 조언을 청한다면 받아들여질 확률이 높아요.” 그런 경험은 학계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초임 교수로 부임해 아직 인지도가 낮을 때, 학교에 드론 분야 유명 교수들을 초청해 학술대회를 열었단다. 학생들에게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나눠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초짜입니다. 우리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도와주세요.” 다음엔 군 프로그램 디렉터를 만나 초청 연사의 리스트를 보여줬다. “이런 연사들을 모아 학술대회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초대했다. 이것이 선순환을 불러 일으켰다. “군 프로그램 디렉터가 오면 모두들 오니까요. 그 뒤엔 사람들이 제 이름을 기억해 줍니다. ‘아, 그 학회 성공적이었어. 폴이 애썼어.’” 학회를 마치면 학술지의 스페셜 이슈를 발간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편집은 귀찮고 힘든 일입니다. 반면 매거진에 나오는 건 학자들이 원하는 일이죠. 저 한 사람이 에디터로 봉사하면 모두가 행복해집니다.”

학생들은 혀를 내둘렀다. “소셜해지는 것, 소셜하게 보이는 것이 공부보다 어렵겠어요.” 그는 말을 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식이 많으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니에요. 이건 ‘소셜뱅크에 어카운트를 만드는 일’과 비슷해요. 귀찮고 힘든 일이 신뢰도를 높이고 힘을 실어줍니다. 소속된 집단에 봉사하세요. 저는 그렇게 커리어를 발전시켜왔습니다.”   영어로 논문을 읽고 쓰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고단함을 고백하는 학생에게는 ‘먼저 빅 픽쳐를 그리라’는 조언을 들려줬다. “영어로 된 모든 논문을 읽을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하면 네이티브 학생들과 경쟁이 되지 않죠. 어떤 논문이 빅 픽쳐를 그리는지를 발견하세요. 어떤 아이디어를 어떻게 트레이닝하는지 말이죠. 냄새를 맡아야 해요. 이건 일종의 본능이자 훈련으로 개발할 수 있는 감각이기도 합니다.”

다음 논문작성 단계에서 그가 조언하는 방법은 ‘단순하게 쓰라’는 것. “영어 논문을 못 쓴다고 걱정하는 학생들에게 늘 하는 얘기가 있어요. ‘먼저 한국어로 써보라. 여전히 쓰지 못할 거다.’ 그건 언어의 문제가 아니에요. 영어는 오히려 문제를 쉽게 만들죠.” 그는 모든 문장을 열 단어 이내로 완성하도록 가르친다. “과학 논문의 제일 조건은 단순함이에요. 이건 시가 아니고, 문학작품이 아니에요. 과학적 명쾌함이죠.” 그는 특히 한인 제자들이 영어 문장에 대해 오해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를 왜 하려고 하는지, 왜 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해요.” 제자들에게는 지난 25년 동안 써왔던 논문과 프로포절을 보여주며 연구하도록 내준다고 한다. 학생들에게는 한 달이 걸리는 일이지만, 교수는 하루에도 쓸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멘토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건, ‘질보다 양’이라는 것. “때로는 양이 질보다 중요합니다. 제가 속한 대학은 MIT와 달라요. MIT에서 다섯 개의 논문을 쓴 학생과 경쟁하려면, 저의 제자들은 스무 개의 논문을 써야 합니다. 쓰고 발전시키고 또 쓰는 거죠. 한 개의 논문에 모든 걸 담으려고 하지 말아요. 걸작을 쓰려고 하지 말아요.” 그건 지금껏 많은 학생들이 해왔던 방식과 정확히 반대되는 조언이었다.

 “논문은 요리와 비슷합니다. 어떤 특별한 기교는 있겠죠. 하지만 일정한 과정이 있어요. 먼저 익사이팅한 아이디어가 필요합니다. 기존의 것과 어디가 얼마나 다른지를 파악해야죠. 약간 미친 것처럼 보이는 아이디어도 괜찮아요.” 그는 이미 2002년에 ‘인도어 플라잉 로봇’에 대한 프로포절을 썼다가 그런 취급을 받은 일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드론이 지금처럼 퍼지지 않았고, 유튜브도 없어서 바이럴을 탈 수도 없어 묻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기존에 해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리패키징해야 해요. 모두가 똑같은 재난로봇을 연구하고, 모두가 똑같이 재활로봇을 준비하는 식이어선 곤란합니다.”

아이언링을 낀 남자

폴 오 교수가 옮겨간 라스베가스는 사막의 도시, 카지노의 도시, 그리고 CES(Consumer Technology Association, 매년 1월 라스베가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가전 행사. 올해 주제는 ‘자율주행자동차’였다.)의 도시다. 그는 지난 겨울, RAS의 후원을 받아 윈터스쿨을 열었다. ‘컨슈머 로봇’을 주제로 40여 명의 학생들이 아이디어를 모았다. 세계 최대의 가전쇼 CES와 로봇을 결합한 캠프는 큰 호응을 얻었다. “원래는 서머스쿨로 기획을 했었어요. CES와 결합한 건 후원단체인 RAS(Robotics and Automation Society)의 요구 때문이었어요. 그 시기 라스베가스의 모든 호텔은 동나고 물가도 엄청나게 오릅니다. 학생들에게 받는 저렴한 참가비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죠. 그런데도 학생들에게는 세계 각지에서 모이는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을 볼 수 있는 기회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 RAS의 판단이었어요.” 

▲ 강연을 듣고 있는 윈터스쿨 참가자 모습. 강연자는 이민구 박사. (사진=사진: 이세리 걸스로봇 1기 펠로우)

그는 CES에 참석하는 유명인들을 캠프 연사로 초대했다. 아이아나 하워드 조지아텍 교수가 HRI 강연을 하고, 홍콩의 지솅리 DJI 공동창업자가 와서 드론에 대해 강의했다. 특히 지솅리 교수는 두 명의 여성 엔지니어들과 함께 방문했다고 한다. 북미에서 우선 선발한 참가자 40여 명 중, 여학생은 걸스로봇의 1기 펠로우인 이세리 학생(국민대 4학년) 하나뿐이었다. 아시아인은 일본 도쿄대 마사유키 이나바 교수의 학생 한 명이 더 있었다. 특별한 기회를 준 데 감사를 표하니, “다음에는 더 많은 여학생을 받아 여성 교수를 배출하고 싶어요.”라고 화답해줬다. 한국계 여성 교수가 특히나 귀한 로봇 커뮤니티에서 이런 협력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요즘 그는 컨슈머 로봇에 꽂혀 있다. 워크맨이나 개인용 컴퓨터, 인터넷처럼 과학기술은 하키스틱처럼 급격하게 꺾이는 그래프를 그리며 폭발적으로 대중화된다. 폴 오 교수는 로봇의 대중화도 향후 10년 사이 그런 폭발기를 겪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또한 ‘소비와 향락의 천국’ 라스베가스는 그 중심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미국의 제조업이 시들해지면서 불야성을 이루던 호텔과 카지노 산업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로봇은 라스베가스에 다시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을까? 이것은 어른들의 관심사다. 연구비도 이쪽에 집중된다. 폴 오 교수의 관심은 조금 다른 데 있다. “드렉셀에서 UNLV로 옮기며 가장 충격을 받은 건 환경이었어요. 라스베가스의 아이들은 펜실베니아의 아이들과는 출발점이 전혀 달랐죠. 나쁘다는 게 아니라 달랐습니다. 제게는 ‘특별한 학생’들이 많아요. 이십 대까지 호텔의 발렛파킹을 도우며 돈을 모으다 삼십 대가 돼서야 대학에 들어가 엔지니어링을 배우는 학생들이죠. 이 친구들은 자기 아이들에게 그런 환경을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다고 해요. 저는 여기서 소명을 느꼈어요.”

▲ ARSO 워크숍 마지막날, 미팅을 마치고 일부러 오스틴대를 찾아와 젊은 한인 연구자들과 만났다. 그는 어디를 가든 미리 거기 속한 한인 후학들을 검색하고 그들의 최신 성과를 공부해서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심심파적으로 하는 멘토링이 아니라, 소명의식을 갖고 십년 넘게 해온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라스베가스 호텔에 컨슈머 로봇을 넣고, ‘로봇랜드’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싶어한다. 컨슈머 로봇이란 프론트 데스크에서 손님을 받고, 판매대에서 명품을 소개하며, 카드와 칩을 싣고 고객에게 다가가 잭팟을 터뜨릴 기회를 제공하는 모든 종류의 서비스 로봇을 말한다. 하다 못해 로봇 청소기마저도 라스베가스에 있는 수천 개의 호텔을 테스트베드로 만들 수 있다는 것. CES 기간 동안 윈터스쿨을 열었던 것도 넓게는 그런 이유였다. 그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실험하고 있다.

그는 절박해 보였다. MIT나 하버드의 ‘특별한 학생’들을 거느린 스타 교수들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다.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테뉴어나 펀딩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물이 되었지만, 여전히 로봇랜드라는 조금 황당하고 허망해 보이는 꿈을 들고 다니며 판다. 그는 IROS를 라스베가스에 유치했다. 학회가 열리는 2020년까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내고 싶다고 했다. “한국에서 6-7년 전에 로봇 테마파크 아이디어를 냈어요. 훌륭한 생각이었지만, 마켓이 없었죠. 냉정하게 말해 판교는 홍콩이나 선전 같은 마켓이 아니에요. 라스베거스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로봇랜드가 생기면, 라스베가스의 아이들은 빌보드 댄서나 웨이터나 발렛파킹 말고도 다른 직업을 꿈꿀 수 있게 돼요. 다른 세계가 열리는 거죠.”   그는 처음부터 그랬다. 애초에 공대에 진학한 건, 사촌 형님들이 만지던 비행기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 때문이었다. 또 일본과 일본의 제조업에 대한 관심도 한 몫을 했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가족의 뿌리에 대해 더 알게 되는 한편으로, 일본을 더 잘 관찰할 수 있었다. “집안 어른들이 ‘네가 가진 기술로 사회에 봉사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잖아요. 저는 무너진 미국의 제조업을 되살리는 데 기여하고 싶었죠. 포드는 망했고, 토요타는 어떻게 하나 보고 싶었어요. 현대차는 그걸 또 어떻게 배워서 적용하는지 궁금했고요.” 그런 사회적 소명을 폭발시킨 건 2001년의 9.11 테러였다.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로봇이 어떻게 커뮤니티를 구할지 연구했다. 드론에 이어 휴머노이드까지 관심의 영역이 넓어진 건 그래서다.

 

▲ 아이언 링. 28년째 폴 오 교수의 왼손 새끼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 퀘벡 교 건설 당시 사고현장에서 수습한 부속물로 만들었다고 한다. 캐나다의 공대 졸업생들은 이 반지를 서명하는 손에 끼고, 엔지니어로서의 사회적 소명을 되새긴다.

폴 오 교수의 왼손 새끼손가락에는 은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흠집이 많이 나 있었다. 결혼반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소박한 것이었다. “아, 이거요? 캐나다 공대 출신들은 다 이 반지를 껴요. 아이언 링이라고 부르죠. 사인하는 손에 끼우고, 사인할 때마다 반지가 책상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하라는 거에요. 우리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엔지니어라는 걸.”

그건 비극에서 시작된 오래된 전통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손꼽히는 퀘백교를 건설할 당시, 1907년과 1916년 두 차례 일어났던 붕괴사고로 90여 명의 사람들이 희생됐다고 한다. 그 사고는 엔지니어들을 각성시켰다. 삼풍이 그랬고, 성수대교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엔지니어의 잘못이었다. 잘못된 설계는 이렇게 큰 비극을 낳는다. 이후 현장에서 나온 부속물을 수거해 아연 도금한 반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캐나다 공대를 졸업하는 엔지니어들은, 긴 쇠줄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 선서를 하고 아이언 링을 받는다. ‘아이언 링 세러모니’라고 부르는 중요한 의식이란다. 선배에게서 후배로 이어진 아이언 링을 끼우고, 프로페셔널로서 약속하는 것이다.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겠다고.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28년 동안 끼어 온 반지는 처음의 각진 모양을 잃고 울퉁불퉁해졌다. 그 세월은 그의 새끼 손가락에 동그란 자국을 만들었다. “저도 은퇴하면 이 반지를 학교에 반납하겠죠. 그 때까지 엔지니어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어요.” 그의 얼굴에도 동그란 웃음이 번졌다. 역시 기술보다 사람이다.[폴 오(Paul Oh), 바이오그래피]

폴 오(Paul Oh), 한국명 오필호(吳弻鎬)
1966년 8월 17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출생
1985-1989년 캐나다 맥길대 졸업 (우등)
1989년 한국 입국, 언어 연수
1990-1992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석사
1993-1999년 미국 컬럼비아대 박사
1998년 결혼
2000-2014년 미국 드렉셀대 교수
2001년 큰딸 Olivia (한국이름 수현) 출생
2003년 작은딸 Sophia(한국이름 수민) 출생
2004년 NSF 커리어 어워드 수상
2005년 AE 랄프 티토 공학교육상 수상
2006년 보잉 웰리버 펠로우
2008-2010년 NSF 로보틱스 디렉터
2014년부터 UNLV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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