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 6화. AAAS 여자들 ‘퀴어를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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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트랜스젠더 여성이라고
한 번 상상해 봅시다

네, 사실 트랜스젠더를 상상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퀴어에 대한 이해가 없는 시스젠더 이성애자이거나, 트랜스젠더의 존재 자체를 종교적 혹은 신념적으로 반대하고 계신 분이라면 더욱 상상하기 어려울 겁니다. 상상을 돕기 위해 몇 가지 상황을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상상해 봅시다.

당신에게는 아직 ‘남성의 신체부위’가 남아있습니다. 이를 제거하기 위한 수술비 몇 천만 원을 마련하기에는 당장의 생활이 빠듯해요. 때문에 국내에서의 법적 성별 정정 절차를 받을 요건이 되지 않고, 따라서 법적으로는 당신은 여전히 ‘남성’입니다.

그런데 꾸준히 진행한 호르몬 대체요법 덕분에 당신의 외모는 어느새 ‘여성’에 가까워 보입니다. 당신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당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당신을 자연스럽게 ‘여성’으로 여기고 있죠. 이러한 상황 때문에 당신의 신분증은 종종 당신이 당신임을 증명해주지 못하곤 합니다.

 

이상한 나라의
퀴어 앨리스

2011년 5월, 미국 오레곤주 LGBTQA가 주최한 <토요일 밤의 퀴어 프롬(Saturday night’s Queer Prom)>. 당시 테마였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디즈니)>가 게를링거 볼룸 벽에 비춰지고 있습니다. ⓒ 오레곤 데일리 에메랄드

자, 여기서 잠깐 퀴즈를 내볼까요.

당신은 곧 당신을 지지해주는 멋진 팀원들과 AAAS 방문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야 합니다. 당신이 현재 당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어떤 것일까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더라도 괜찮습니다. 남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은 원래 어려운 법이니까요.

별안간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분이라면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미 파악하셨을 겁니다.

네, 이건 이번 글을 쓰고 있는 제 이야기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퀴어 당사자로서 AAAS 참석이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지금까지 저희가 했던 이야기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위주로 다뤘다면, 제가 오늘 할 이야기는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들’에 방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저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저희가 해 온 여성주의의 관점으로 말이죠. 아, 그 전에 퀴즈의 답을 알려드려야겠군요.

제게 닥친 가장 큰 산은 ‘여권 만들기’였습니다.

여권 접수를 담당하는 공무원은 신분증과 제 얼굴을, 제 얼굴과 제 여권사진을, 제 여권사진과 신분증을 몇 번이고 비교해보며 말했습니다.

“아니, 그럼 이건 누구야?”

캐나다에서는 여성과 남성 이외의 젠더를 표현할 수 있는 여권을 상용화했습니다.

사실 진작 신분증 사진을 바꿔두지 않았던 제 잘못도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여기에도 사정은 있었죠. 동사무소에서도 언제나 같은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지요.

제 신분증은 제가 저라는 걸 증명해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보기엔 얼굴도 거의 달라지지 않았고 단지 겉으로 보이는 성별(Passing Gender), 혹은 스타일만이 다를 뿐인데 말이죠. 저처럼 성별 이분법에서 어긋나 버린 사람들은 신분을 확인받아야 할 때마다 매번 스스로의 존재를 설명해야만 하죠. 사실 꽤 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여권을 받자마자 제가 한 걱정도 그 연장선이었습니다.

‘설마 출입국 절차에서도 문제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만, 길고 복잡한 출입국 절차는 거치면서 새로운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다른 나라에서 누구 하나 성별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거든요. 여권에 적힌 성별을 확인했음에도 그들은 꼬박꼬박 저를 ma’am으로 불렀습니다. 저는 대체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온 건지 궁금해졌어요.

제 젠더가 남성이라고요? 정말로? (사진- UA 앱 캡쳐)

단순한 공항과 관공서의 차이일까요?
사회적/문화적 배경이 달랐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저 동대문구청의 문제일까요?

글쎄요, 물론 동대문구청이 퀴어 여성 체육대회를 위한 체육관 대관을 돌연 취소한 전적이 있긴 하지만(기사보기), 그것이 해당 구청이 가진 특수성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그보다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퀴어가 낯선 존재라는 점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겠죠.

저는 계속 이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AAAS 현장에서 더욱 많은 것들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그 곳에서 저는 퀴어 과학자들이 자신의 성과를 공유하고, 퀴어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실증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또 다른 퀴어 과학자를 지원하며, 나아가 여전히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편견, 불합리들을 고쳐나가기 위해 애쓰는 장면들을 보았습니다.

 

다양성 확보를 위한
노력들

물론 이는 결코 하루아침에 얻은 성과가 아닙니다. AAAS에서 세션들을 진행한 퀴어 과학자 그룹 NOGLSTP(National Organiztion of Gay and Lesbian Scientists and Technical Professionals, 전미 게이와 레즈비언 과학자 및 기술전문가 기구)의 전신은 이미 1980년대에 등장했습니다. AAAS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 조항이 통과된 건 이보다 더 이른 1975년의 일입니다.

미국에서 반퀴어적인 법안이나 정책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주들을 표시한 지도 (C) Feministing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역시 지금의 우리와 비슷한 분위기였던 모양입니다. 당시의 많은 퀴어 과학자들이 커밍아웃을 꺼렸습니다. 학계와 정부기관 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퀴어 정체성이 많은 불이익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이익을 해결하기 위해 NOGSTP는 비영리기구 아웃앤이퀄(Out & Equal)과 함께 STEM 필드에서 활동하는 퀴어들의 일자리 보장을 위한 사업을 우선적으로 진행했습니다. 이들은 앨라이인 경영진들을 만나고, 기업의 지분을 사들이고, 부당한 인사조항에 개입하며 기업의 문화를 바꿔 나갔습니다.

30년간 진행해온 이러한 노력들이 바탕이 돼, NOGLSTP는 오늘날까지 AAAS 제휴기관으로서 여러 활동을 진행해 왔습니다. 올해는 특히 12개에 달하는 프로그램을 AAAS서 진행하기에 이릅니다.

그 중 하나는 oSTEM(Out in 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ematics), ACS(American Chemical Society, 미국 화학회) 산하 부서(Gay and Transgender Chemists and Allies Subdivision) 등 STEM 영역에서 활동하는 유관 퀴어단체들과 연대해 진행한 ‘STEM 내 퀴어 친화적 환경 조성(Creating a Safe and Welcoming Environment for LGBTQ+ People in STEM)’에 관한 세션입니다. 특히나 해당 세션은 역대 가장 보수적이라 악명 높은 현 미국정부로부터 재정지원 하에 진행되었던 비퀴어·앨라이 대상 세션이었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는 다양성을 확보한 전문가를 양산하는 것이 더 이상 ‘퀴어만의 문제’이거나 ‘STEM 필드만의 문제’만은 아니란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이들에게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겁니다.

관용이 아니라
존중의 문제

저희와 인터뷰한 NOGLSTP의 창립자 로셸 다이아몬드(Rochelle Diamond) 대표는 과학자로서 여러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이건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존중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저희보다 훨씬 앞서기만 한 그들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존중’은 요원합니다.

NOGLSTP 의 집회 현장 (C) NOGLSTP 공식 트위터

특히 트럼프 행정부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결정된 많은 진보들을 후퇴시키고 있습니다.

“트랜스 여성은 여성이 아니며, 따라서 시민 권리 장전 7조의 성차별이 트랜스 여성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트럼프 행정부는 트랜스 여성은 여성이 아니며 따라서 시민 권리 장전의 7조와 9조가 명시하고 있는 성차별 금지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부 조직들이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을 문제삼기 시작했고, LGBTQ의 권리와 관련된 모든 사항들이 웹사이트에서 사라졌죠. 또한 종교를 이용해 캠퍼스에서 연애하는 동성애자학생들을 대학에서 내쫓을 수 있게 했습니다. 만약 대학들이 정부의 이러한 정책들에 따르지 않을 경우 연방정부는 언제든 재정 지원을 줄일 수 있죠.

좋은 소식은 지금까지 쌓아온 이들 과학 퀴어단체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2017년 주정부에서 발의된 129개의 차별적 조항 중 단 12개만 입법됐죠. 많은 사회단체들이 사회적 인식과 편견에 싸워온 덕에 사회의 인식 역시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LGBT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159개의 법안들 중 단 25개만 입법됐다는 아쉬움이 납습니다. 반 LGBT적인 8개 주(올해 AAAS 연례대회가 열렸던 텍사스도 포함됐습니다.)에서는 처리해야 할 법안들이 많이 남아있고, 보다 호의적인 다른 주라고 상황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어느정도 호의적인 주에서조차 주정부 공무원들의 LGBT 관련 미팅 참석을 규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정부의 ‘관용’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지금, 이곳의 퀴어 과학자들은 좌절에 빠져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STEM 영역 내의 퀴어 차별에 대해, 이들이 겪는 불이익, 경험들에 대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실증해 나가고 있죠. 이들은 선배 퀴어 과학자들이 쌓아온 토대 속에서 후배 퀴어 과학자들이 양성되고, 이들이 산재한 문제들을 연구하고, 더 많은 퀴어 과학자들이 수면위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선순환의 구조를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스탠포드 대학 지질환경과학 박사 조이 넬슨(Joey Nelson)의 발표 자료 일부. 아카데미아의 LGBT 인구를 분석했습니다. (C)Joey Nelson

‘나중에, 나중에’

한창 대선이 진행되던 작년 2월의 일입니다. 당시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자 한 여성이 기습 발언했죠.

“제 인권을 반으로 나눌 수 있습니까?”

이러한 발언(기사보기)이 나온 이유는 포럼 3일 전 문 대통령이 기독교 관계자를 만나 차별금지법 반대 의사를 밝혔기 때문입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기습발언자에게 “나중에 발언 기회를 드리겠다”고 말했고, 청중은 하나가 되어 “나중에”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정말 퀴어의 인권은 나중으로 밀려도 되는 것일까요?

‘어떤 인권’을 먼저로 ‘어떤 인권’은 나중으로 둘 수 있을까요? 우리 개개인이 다름을 존중한다고 해서, 혹은 국가가 다문화 정책을 공격적으로 시행한다고 해서 어느날 갑자기 우리나라가 다양성이 풍부한 국가로 뿅! 바뀌는 것은 아닐 겁니다. ‘다름’에 대한 공포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안에서 뚝! 사라지지도 않을 겁니다.

우리는 늘 다른 것, 낯선 것보다 같은 것, 익숙한 것을 선호해 왔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것, 낯선 것들을 적극적으로 배척해왔죠. ‘다문화’(기사보기), ‘임대아파트’(기사보기)를 놀림거리로 삼는 어린 아이들이 그랬고, 그 이전부터 신체적 정신적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이주민 온갖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유머로 소비해왔던 우리 어른들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다름을 공격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그려봅시다. 숨겨져 있던 ‘다름들’ 속의 많은 가치가 재발견되고, 차별들과 편견들이 점차 힘을 잃는 장면을요. 상상해 봅시다. 이주 노동자의 아이가 한국에서 교수가 되고, 여성 과학자가 세계적인 성과를 내고, 그 과학자를 보고 자란 트랜스 여성이 노벨상을 타는 모습을요.

우리도 이제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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